민수(이율)가 윈도우 바탕화면 뒤에서 그네를 타며 노래한다. “남들과 똑같은 그런 꿈이 아닌 더 높은 무언가가 없을까.” 하지만 민수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유일한 핏줄이자 영원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던 외할머니 차여사는 2억 6천만 원어치 빚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고,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고 나니 수중엔 40만 2천5백33원만이 남았다. 그 중 30만원을 뚝 떼어 고시원에 들어왔다. 평점 4.0에 토익 900점, 명문대를 나와 대학원에 다니지만 “배경도 재능의 일부”라며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 이어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취객의 토악질로 뒤범벅되고, 유통기한 지난 삼각깁밥까지 남들이 빼앗아간다. 겨우 돌아온 고시원 쪽방은 누워도 다리가 다 뻗어지지 않는다. 505호에 사는 민수는 현실을 잊기 위해 상상을 하고 퀴즈를 푼다.

김영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가 지난 6일부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취직 못한 스물일곱 대학원생 민수를 통해 뮤지컬은 이 시대를 사는 20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대로 된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 면접관, 오답을 말해야 하는 시나리오를 알면서도 “이 곳의 규칙을 따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동료, 정답을 말해도 “세상이 원하는 답이 아니”라며 그를 내쫓는 상사 등으로 대변되는 벽은 민수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까. 위태롭게 흔들리는 민수가 선택할 보기는 내년 1월 2일까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민수입니다


이춘성 역으로 작품에 참여한 성기윤은 “글이 갖고 있는 상상력을 눈에 보이게 하기란 쉽지 않다”며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는 간결한 외형에 작품의 의미를 담았다. 최근 뮤지컬 을 통해 조명과 영상으로 구체적인 무대를 만들어낸 박동우 디자이너의 무대에 “수학적이고 기하학적 느낌이 들도록 직선적인 동선과 그림을 주로 사용”한 박칼린의 연출기법이 만나 극 전체를 감싸는 탁월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연회색 큐브로 가득찬 무대는 바와 바 사이 빈 공간에 조명으로 고시원 쪽방을 만들어내고, 영상을 투영시켜 환상 속 퀴즈회사로도 만든다. 큐브처럼 꽉 짜여진 무대가 앞으로 다가올 때는 관객들 역시 민수가 되어 벽에 가로막힌 심정이 되기도 한다. 무대 외에도 사다리를 이용한 88만원 세대의 면접 장면은 신선한 느낌이다. 각기 다른 길이의 사다리는 그들의 스펙을 표현하고, 사다리를 내리치는 안무는 단발마 같은 소리와 함께 폭발하는 에너지를 탁월하게 그려낸다.하지만 2시간 30분에 달하는 스토리 전개는 좀 더 나사를 바짝 조일 필요가 있다. 2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수의 ‘퀴즈쇼’는 물 셀 틈 없이 흘러가지만, 소설 속 디테일한 감정들이 잘려나가면서 1막에 등장해야 하는 민수의 절박함은 다소 심심하게 드러난다. 수희(진수현)의 자살,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고충 등 내용들이 단편적으로만 설명되면서 민수가 절박해서가 아닌 나약함 때문에 현실도피를 감행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지원(전나혜)과의 멜로 역시 큰 비중이 되지 못하면서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환상에서 벗어나도 결국 민수는 헌책방에서 일하게 된다는 마지막 엔딩은 변함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듯 해 더욱 냉정하고 차갑지만, 그게 현실이다.

사진제공_신시컴퍼니

글.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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