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55분, 예정된 소집 시간에서 5분밖에 남지 않았다. 혹시라도 늦을까봐 동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늘이 형에게 전화가 온 건 어젯밤이었다. “근배 형, 무슨 일이세요?” “동호야, 미안한데 내일 형 예비군 훈련 좀 대신 나가주면 안 될까? 형이 급한 일이 좀 생겨서.” “시간은 괜찮은데 제가 어떻게 형을 대신해요?” “괜찮아, 그냥 조교한테 이근배라고 말하면서 내 신분증만 주면 돼. 얼굴 확인 안 해.” 동호는 절대 들키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하늘이 형이 말해준 농구장에 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왔나? 어리둥절해 할 때 저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동호야, 네가 웬일이야?” ‘남자의 자격’ 팀 성민이 형이었다.

10시 30분, 슬슬 아는 얼굴들이 어슬렁어슬렁 모이기 시작했다. ‘천하무적 야구단’과 ‘1박 2일’, ‘남자의 자격’ 출연자들의 예비군 훈련을 하루에 몰아서 하자는 건 KBS 예능국의 자체 회의를 통한 결과였다. 이리저리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골치를 썩이느니 하루 날을 잡아 녹화 스케줄을 비우고 예비군 훈련을 해결하자는 거였다. 나름 편의를 생각해 여의도 공원에서 훈련을 하기로 했지만 예비군 소집 시간을 지키는 건 루저나 하는 짓이라고 창렬은 생각했다. 모두들 상의는 바깥으로 내놓고, 고무링도 차지 않고, 전투모는 4㎝ 정도 띄웠지만 그 중에서도 전투모 대신 두건을 매고 상의는 풀어헤친 창렬의 복장은 가장 눈에 띄었다. “형! 여기요!” 먼발치서 동호가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전투모엔 개구리 마크를 ‘오바로크’ 쳤지만 상의를 바지에 꼭꼭 숨기고 전투모를 꾹 눌러쓴 폼은 완전히 이등병이다. 안되겠다, 오늘 녀석에게 진정한 남자의 혼을 가르쳐줘야겠다.

11시 10분, 드디어 이경규가 도착했다. “슨배니임~! 이제 오셨어예.” 방금 전까지 이수근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호동이 뛰어가 배꼽 인사를 했다. 조교 김상병은 한숨이 나왔다. 이 아저씨들을 데리고 남은 6시간 50분을 어떻게 이끌지 감이 안 잡혔다. “조교가 이름을 부르면 3번 부를 때까진 대답하지 마. 고분고분하게 굴면 지는 거야. 알았지?” 블랙리스트 1번인 김창렬은 동호에게 예비군 수칙을 가르치고 있고, 김국진은 MC몽과 이윤석, 한민관을 앉혀놓고 DMZ에서 만난 야생 멧돼지를 원 펀치 투 어금니로 보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선배님들! 탄띠 지급하겠습니다!” 갑자기 김태원이 손을 들었다. “저기, 탄띠를 받으면 매야 되나?” “그렇습니다, 선배님.” “나는 신발주머니도 무거워서 학교를 맨손으로 다닌 사람이야. 지금 전투모 걸친 것만 해도 목이 꺾일 거 같아.” 다시 한숨이 나오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강호동과 김C다. “아니, 내가 뭘 어쨌는데 그래요.” “아니, 그래도 우리 ‘1박 2일’이 먼저지, 여기서 감독 노릇하고 있으면 되나.” “내가 무슨 감독 노릇을 했다고 그래. 그냥 야구단 멤버들이랑 다음 시합 전략 좀 짜고 있었는데.” 이 때 김창렬이 끼어들었다. “호동 씨, 우리 감독님한테 무슨 불만 있어요?” 호랑이와 사자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지만 드디어 일이 벌어질 기세다.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김상병의 전화벨이 울렸다. 동대장이다.11시 22분, 갑자기 조교가 얼굴이 하얘져서 외쳤다. “선배님들! 비상입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창정은 김이 샜다. B급들만 잔뜩 모인 훈련에 참여해서 짜증나는 중에 그나마 싸움 구경이라도 할까 했더니 조교가 분위기를 깨고 있다. “왜, 장동건이랑 고소영이 사귀기라도 한대?” 원래 이쯤에서 뒤에 있는 예비역들이 웃어주면서 다른 농담을 쳐줘야하는데 리액션이 없다. 창정은 이런 상황을 잘 안다. 수컷끼리 모였을 땐 조용히 ‘포스’를 풍기거나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주도해야 하는데 그걸 실패하면 A급 아니라 S급이라도 훈련이 끝날 때까지 입지가 약해진다. 자칫 남의 도시락을 대신 받아와야 할 수도 있다. 이럴 바엔 조교에게 붙는 게 낫다. “그래, 조교야, 나 이제 너의 말을 경청하고 싶어졌어. 말해봐.” “선배님들, 괴한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근데?” “지금 가장 가까운 가용 병력이 선배님들이라 그쪽 상황에 투입하시랍니다.” 미쳤군. 창정은 생각했다.

11시 45분, 점심시간까지는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선배님들, 빨리빨리 작전 투입하십니다!” 조교가 외쳤지만 모두들 점심시간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선배님들!” “형들 귀 안 먹었다. 우선 담배 한 대 피고 생각해보자.” 경규는 5개비 째 담배를 꺼내 물며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단순히 점심에 우동을 먹을지 도시락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조교가 말하면 우선 무시하는 게 예비역의 수칙이다. 하지만 끝까지 무시만 할 수 없는 것도 예비군 훈련의 수칙이다. 조교가 짜증을 내고 동대장이 쳐들어오면 분위기 수습이 안 된다. 예비역은 예비역대로 자존심을 지키면서 조교의 말도 들어주는 그 지점을 찾아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아니,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최고령이기 때문에 모두들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건 호동이 그를 깍듯이 대접하기 때문이다. 실질적 리더는 자신이 아니다. “호동아! 네가 알아서 해라! 내가 따를게.”

11시 55분, 단 5분 만에 호동의 머릿속은 정리됐다. ‘1박 2일’을 하며 언제나 제작진에게 협상 카드를 던지던 희대의 승부사 아니던가. “조교야, 지금 우리가 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거지?” “그렇습니다, 선배님.” “그럼 가야지. 그런데 사실 우리 다들 내일 스케줄 있고, 오늘 모이는 것도 정말 어렵게 모인 사람들인데 상황 투입까지 가는 건 좀 힘든 일이잖아, 그렇지?” “그렇지만, 선배님…” “아니, 우리가 안 가겠다는 게 아니라 가서 상황 종료하면 몇 시에 끝내든 오늘 교육 종료, 콜?” “콜 받고 건빵 10봉지 더.” “오케이, 협상 끝.”12시 35분, 국회의사당에 투입될 인원을 뽑는 복불복이 30분이나 걸렸다. 김C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운 없음에 대해 한탄했다. 입 안은 즉석에서 제조한 담뱃재 커피 때문에 아직도 씁쓸하다. 그나마 굳이 복불복을 하자고 했던 호동, 경규 등이 같이 포함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C가 우리 중 브레인이니까 작전을 좀 짜봐.” 호동의 말에 내가 무슨 브레인이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하필 운 없이 복불복에 같이 걸린 동호가 ‘감독님만 믿어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김C는 기왕 브레인 노릇을 할 거라면 한 번 쯤 호동을 눌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제 지시에 모두들 군말 없이 백 퍼센트 따르겠다고 약속하면 제가 작전을 짤게요. 오늘 이 작전에서만큼은 선배고, 군번이고 없이 제 말이 법입니다.”

1시 23분, 7인의 특공대는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성민은 TV 속 A특공대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떨렸다. 그가 정말 해보고 싶던 101가지 중 하나다. 김C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MC몽이 원숭이 흉내를 내며 테러리스트에게 돈을 구걸하는 틈에 창렬, 호동과 함께 테러리스트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 사이 나머지 대원들은 국회의원들을 뒷문으로 빼돌리기로 했다. 머리 좋은 김C가 “성민 씨, 이건 성민 씨만 할 수 있는 거예요”라고 말해준 것만으로 성민의 몸엔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하게 분비되기 시작했다. “우끼끼끼끼!” 작전 시작이다. 성민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뛰쳐나갔다. 급습을 당한 테러리스트들은 창렬과 성민의 매콤한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호동은 그냥 허리춤을 잡고 메다꽂는 분위기였고 성민은 미스터T에 ‘닥빙’되어 주먹을 휘둘렀다. 한 놈, 두 놈, 세 놈,…스물다섯 놈, 스물여섯 놈… “아악! 난 국회의원이란 말이야!”라는 외침이 국회를 가득 채웠지만 성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2시 15분, 점심시간은 지나도 한참 지났다. 하지만 오후 6시까지 예정되어 있던 훈련을 안 해도 된다는 건 동호가 생각해도 즐거운 일인 것 같았다. 심지어 이경규 아저씨가 연장자로서 자장면을 쐈다. 그 와중에 중국집과의 협상을 통해 서비스 군만두를 두 개나 얻어낸 호동이 형의 모습이 동호에겐 너무나 멋져보였다. “그래, 느들은 어쩌다 이런 짓을 하게 되었노.” 자장면을 후루룩 거리던 호동이 형의 물음에 테러리스트는 징징 울면서 말했다. “사실 저희 뒤에 배후 세력이 있어요. 국회의원들이 자기들 버는 건 생각 안하고 출연료 가지고 시비 건다고…” 순간 호동이 형의 눈이 번뜩였다. 경규 아저씨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걔들…인 건가?” “그런 거 같은데예.” “호동아, 너 이번 기회에 재석이랑 최강을 놓고 제대로 한 판 해야 하지 않겠냐.” “어데예, 재석이가 저보다 낫지예. 그런데 김C, 솔직히 나는 몰라도 우리 김C가 명수나 쩌리짱보단 낫지 않나.” 동호도 눈치 챘다. 이 일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다. 방금 전까지 입가에 자장을 묻히고 퍼져있던 형님들의 눈빛이 갑자기 전의로 불타오르는 걸 보며 동호는 남자로서 한 뼘 더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일러스트레이션_ 그루브모기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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