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전, 아들아이의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났어요. 아들아이와는 유아원 시절부터 친구인지라 마치 군대 가 있는 아들이 돌아온 양 반가웠답니다. 그런데 이 녀석, 그간 운동을 꽤나 열심히 한 모양이에요. 어릴 적엔 여릿한 체구에 장난기가 그득하던 아이였는데 웬걸, 이젠 트렌디한 근육질 몸매로 변신했더라고요. 과거 수영장 물이 무섭다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때를 추억해보면 지금처럼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다는 게 마냥 대견하지 뭐에요. “어머 너 이게 웬일이니” 하며 웃으니 머쓱해하는 녀석과 이런저런 안부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어째 제 자식처럼 마음이 흐뭇했어요.
한나 양, 어느 새 한나 씨가 되었네요
얼마 전 MBC ‘무릎 팍 도사’에 나온 한나 씨를 봤을 적에도 딱 이런 기분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로 우뚝 서준 것도 장하지만 무엇보다 깊고 너른 가슴을 지닌 처자로 반듯하게 자라준 것이 고마웠어요. 영재니 신동이니 하며 떠들썩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요. 그런데 음악가로는 물론 순수하면서도 사려 깊고, 진실 되고,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잘 자라주었으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들 뿌듯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는 한나 씨도 국민여동생이었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어언 이십년 가까이 장한나 양이라고 부르다가 ‘씨’를 붙이려니 영 어색하네요. 어차피 지휘자로도 맹활약 중이니 그냥 ‘장마에’로 부르려고요.제가 장마에를 처음 알게 된 건 아마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우수상을 받아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을 때일 거예요. 토실토실하니 귀여운 어린 소녀가 놀랍도록 격정적이고 성숙한 연주로 온 국민을 매료시켰죠. 우리 아이들도 어린 한나 양의 연주 덕에 클래식에 입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첫 앨범은 물론 스승이신 미샤 마에스키의 앨범들까지 죄다 사서 온 식구가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아이들이 첼로 레슨을 시작했었는데 다들 어찌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다못해 교육도 유행을 타는 나라거든요. 누가 웅변한다 하면 다들 우르르 웅변 배우러 몰려가고, 글짓기 배운다 하면 이번엔 다들 글짓기 학원으로 몰려가는 식이죠. 그러니 장마에의 연주에 꽂힌 부모들이 너도 나도 첼로를 시키겠다고 나선 건 당연지사였던 거예요. 허나 첼로라는 악기가 어디 의욕만 갖고 되는 거랍니까? 본인의 엄청난 노력과 부모의 희생이 필수조건인지라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이삼년 끌다가 대부분 포기했지 싶네요.
‘장마에’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
그런데 장마에도 첼로에 입문한지 반년이 지날 때까지 별 흥미를 못 느꼈었다면서요? 그러다 놀아주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한 대학생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첼로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죠? 그 후 로스토로포비치를 비롯하여 꼭 필요한 시기에 꼭 적합한 스승을 만났던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니, 좋은 스승을 만나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통감했어요. 또한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하는 환경이 딸에게 좋을 리 없다는 생각에, 자신들이 쌓아온 삶을 과감히 포기하신 부모님의 헌신도 감동적이고요.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첼로가 싫으면 그만둬도 좋다고 하셨다니 참으로 비범한 어른들이시지 뭐에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공을 스승님들과 부모님께 돌릴 줄 아는 장마에의 내공도 보통은 아니십니다. 그날 워낙 감명 깊은 얘기들이 많이 나왔지만 저는 특히 이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어요. “음악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음악만 아는 사람이긴 싫다. 음악의 감동도 나누고, 열정과 사랑도 나누고, 수많은 스승들, 음악가들에게 배운 배움도 나누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얘기 말이에요. 저는 이 얘기를 좀 더 많은 이들이 가슴에 새겼으면 해요. 그래서 한때 천재 소녀 첼리스트의 등장으로 첼로 붐이 일었듯이 ‘나눔’의 미덕도 유행처럼 번진다면 좋겠어서요. 그리고 나아가 한때의 유행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아아, 정말이지 장마에에게서 가장 부러운 건 음악가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그 기품 있는 마음씨였다고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한나 양, 어느 새 한나 씨가 되었네요
얼마 전 MBC ‘무릎 팍 도사’에 나온 한나 씨를 봤을 적에도 딱 이런 기분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로 우뚝 서준 것도 장하지만 무엇보다 깊고 너른 가슴을 지닌 처자로 반듯하게 자라준 것이 고마웠어요. 영재니 신동이니 하며 떠들썩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요. 그런데 음악가로는 물론 순수하면서도 사려 깊고, 진실 되고,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잘 자라주었으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들 뿌듯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는 한나 씨도 국민여동생이었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어언 이십년 가까이 장한나 양이라고 부르다가 ‘씨’를 붙이려니 영 어색하네요. 어차피 지휘자로도 맹활약 중이니 그냥 ‘장마에’로 부르려고요.제가 장마에를 처음 알게 된 건 아마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우수상을 받아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을 때일 거예요. 토실토실하니 귀여운 어린 소녀가 놀랍도록 격정적이고 성숙한 연주로 온 국민을 매료시켰죠. 우리 아이들도 어린 한나 양의 연주 덕에 클래식에 입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첫 앨범은 물론 스승이신 미샤 마에스키의 앨범들까지 죄다 사서 온 식구가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아이들이 첼로 레슨을 시작했었는데 다들 어찌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다못해 교육도 유행을 타는 나라거든요. 누가 웅변한다 하면 다들 우르르 웅변 배우러 몰려가고, 글짓기 배운다 하면 이번엔 다들 글짓기 학원으로 몰려가는 식이죠. 그러니 장마에의 연주에 꽂힌 부모들이 너도 나도 첼로를 시키겠다고 나선 건 당연지사였던 거예요. 허나 첼로라는 악기가 어디 의욕만 갖고 되는 거랍니까? 본인의 엄청난 노력과 부모의 희생이 필수조건인지라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이삼년 끌다가 대부분 포기했지 싶네요.
‘장마에’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
그런데 장마에도 첼로에 입문한지 반년이 지날 때까지 별 흥미를 못 느꼈었다면서요? 그러다 놀아주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한 대학생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첼로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죠? 그 후 로스토로포비치를 비롯하여 꼭 필요한 시기에 꼭 적합한 스승을 만났던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니, 좋은 스승을 만나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통감했어요. 또한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하는 환경이 딸에게 좋을 리 없다는 생각에, 자신들이 쌓아온 삶을 과감히 포기하신 부모님의 헌신도 감동적이고요.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첼로가 싫으면 그만둬도 좋다고 하셨다니 참으로 비범한 어른들이시지 뭐에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공을 스승님들과 부모님께 돌릴 줄 아는 장마에의 내공도 보통은 아니십니다. 그날 워낙 감명 깊은 얘기들이 많이 나왔지만 저는 특히 이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어요. “음악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음악만 아는 사람이긴 싫다. 음악의 감동도 나누고, 열정과 사랑도 나누고, 수많은 스승들, 음악가들에게 배운 배움도 나누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얘기 말이에요. 저는 이 얘기를 좀 더 많은 이들이 가슴에 새겼으면 해요. 그래서 한때 천재 소녀 첼리스트의 등장으로 첼로 붐이 일었듯이 ‘나눔’의 미덕도 유행처럼 번진다면 좋겠어서요. 그리고 나아가 한때의 유행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아아, 정말이지 장마에에게서 가장 부러운 건 음악가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그 기품 있는 마음씨였다고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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