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르든 하나의 작품이 창작자의 이름으로 기억되기 위해선 독특한 스타일이 필수적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알려진 창작자가 드물지만, 그 중 장유정 연출가는 기존의 뮤지컬들이 갖지 못한 정서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녀는 직접 쓰고 연출한 , , (이하 ) 등을 통해 가난해도 하루하루가 행복한 사람들을, 사랑에 상처받고 자신을 가둔 여자의 마음을, 가장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아버지의 슬픈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특히 대극장으로 옮겨 3번째 시즌을 맞이한 는 서울공연을 마치고 현재 지방공연중이다. 작품을 통해 느림의 미학을 선보이는 장유정 연출가를 지난 7월 30일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마련한 에서 만났다.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워크숍에서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라는 소소한 질문에서부터 현 뮤지컬 시장을 꼬집는 따끔한 지적까지 이어졌다. 참가자들의 열정이 대단하던데, 강의하는 입장에서 어땠나.
장유정 연출가 :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기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영상원을 다니는 동안 내 작품, 선배들 작품 조연출까지 다 하느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10년 동안 여수 고향집에 거의 내려간 적이 없었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이런 워크숍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이 부러웠다.

“남동생 같은 이미지의 김동욱은 일취월장하는 스타일” 2008년 시작된 가 3번째 시즌으로 서울공연을 마무리했다. 지난 시즌들에 비해 수정된 부분들이 있었다면 어떤 부분이 있었나.
장유정 연출가 : 는 시즌이 계속되면서 200석에서 600석으로, 다시 600석으로 800석으로 좌석이 늘어났다. 크게 바뀌진 않지만, 극장이 바뀌면 소극장이 가진 밀도나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강구해냈다. 초반엔 없었던 대금을 넣었는데 직접적으로 잘 들리진 않지만, 대금이 들어가면서 훨씬 더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이 살아났다. 그리고 지루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형을 좀 더 부각시키고 동생은 뒤에 따라오는 방식으로 형제간의 경중을 조금 조절했다.

이번 시즌에는 김동욱과 정준하가 캐스팅돼서 화제를 모았다. 특히 주봉 역의 김동욱은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의외로 노래도 잘해서 놀랐다.
장유정 연출가 : 김동욱은 영상원 후배고, 예전부터 춤을 잘 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기도 곧잘 하고 남동생 이미지로 참 좋지 않나. 사실 노래는 잘 못했는데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첫 리딩할 때 혼자 노래를 모두 외워서 왔고, 하루하루 정말 일취월장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초연 때부터 같은 역을 한 정동화도 너무 잘하지만, 김동욱이 생각보다 너무 잘해줘서 고마웠다.

는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특별히 안동의 종갓집을 소재로 잡은 이유가 있나. 심지어 고향은 전라도 여수인데.
장유정 연출가 : 외할아버지가 종손이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종갓집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자랐고, 긴 테이블만한 댓돌에 매일 가득한 신발들이나 서늘한 광에서 할머니가 빼내주신 곶감 등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할머니 역시 극중 순례처럼 치매로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들을 많이 하더라. 손녀입장에서는 두 분의 사랑이 잘 보이는데 자손들은 그걸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그런 숨겨진 로맨스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안동은 종갓집의 대표적인 곳이다. 9대 이상의 위패를 모신 종갓집의 80%가 경상도, 그 중에 80%가 안동에 있다. 경제학적인 논리로 안동을 선택한거지. (웃음)“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는 공간에 신경을 많이 쓴다”

에도 자기반영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다. 특히나 당신의 작품에는 정서적인 부분들이 도드라지는데, 그런 특유의 스타일이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할 텐데.
장유정 연출가 : 기본적으로 작품을 만들 때 감정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쇼뮤지컬을 잘 못하고 테크닉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은 주변에 아무것이 없을 때에도 가능하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텍스트로만으로 가져갈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었고, 그 부분이 훈련이 많이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 속에 관객들의 정서를 건드리는 지점들이 있다. 특히 넘버 중 춘배를 추모하는 ‘잊혀질 이름만 두고 어디로 가나’라는 ‘곡(哭)’의 가사가 마음에 많이 남았다. 남들이 무의식중에 놓치는 감성적인 부분들을 잘 잡아내는 것 같다.
장유정 연출가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이름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지난번에 어떤 어린 남자아이에게 사인을 해준 적이 있다.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가사가 있으니 그걸 꼭 써달라고 하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에 ‘맞은편 군인의 좌표’라더라. 그냥 적군이라고 하거나 북한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다르게 표현해서 좋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때서야 ‘아, 내가 그랬지’라고 깨닫게 된다. 그게 무의식이고,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기존에도 부드럽고 따뜻하고 휴머니티 있는 작품들을 좋아했고, 앞으로도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 에는 수많은 정서 중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이나 느림의 미학이 도드라져있다. 특별히 그런 작품을 쓰는 이유가 있나.
장유정 연출가 : 촌스러워서 그렇다. 하하. 그런 것들이 재밌고 좋다. 물론 드라마를 쓴다면 장르적 특성상 삐까뻔쩍한 집에 살고, 명품백 들고 남자친구는 대기업 다니는 여자이야기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쓰니까 안하고 싶다.

에서는 종갓집이 하나의 캐릭터로 작용하고 있고,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간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데.
장유정 연출가 :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그들이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석봉이와 주봉이가 안동에 살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고, 의 여자가 인도에 가지 않고 호주에 갔으면 얘기가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공간이 차지하는 부분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의 캐릭터로 만든다.

그 외에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많은 작품에 아버지의 존재가 크게 부각된다는 점이다. 특별히 아버지 캐릭터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있나.
장유정 연출가 : 정말 별의별 아버지가 등장한다. (웃음) 아버지라는 캐릭터가 가진 특성엔 ‘어쩔 수 없음’이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라는 인물 자체는 굉장히 강해보이지만 아버지라는 이름 때문에,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한국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들어간다. 결국 누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현대인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해주고, 그래서 측은함이 든다.“모든 것이 단서가 되는 스릴러를 해보고 싶다”

그동안 직접 극을 쓰고 만드는 창작뮤지컬만 하다가, 올 하반기 를 통해 라이선스 연출 데뷔를 한다.
장유정 연출가 : 기본적으로 작품을 선택할 때 꼭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그동안 들어온 작품들은 나에게 너무 버겁거나 컸다. 보통의 라이선스 같은 경우 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에 창작을 할 여지가 별로 없지만, 이 작품은 대본과 음악만을 사왔다. 그래서 창작을 할 수 있다는 부분이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지극히 미국적이고 쇼적인 뮤지컬인데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 예정인가.
장유정 연출가 : 엘 우즈는 금발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하는 캐릭터이다. 금발이 없는 우리사회에서도 외모, 학벌, 돈 등 다양한 요소들이 편견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동시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미국적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재 미드를 쉽게 접하는 20~30대가 주요 뮤지컬 관객층인 만큼 자연스럽게 만들어 보려고 한다. 그 외에도 스릴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뮤지컬 뿐 아니라 스릴러는 한국에서 잘 통용되지 못하는 장르인데.
장유정 연출가 : 예전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가 극작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느꼈던 때였는데 그때 스릴러를 썼었다. 스릴러는 총이든, 꽃이든, 보라색이든 그 모든 것들이 범인을 찾게 만드는 단서가 되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모두 다 장치여야 된다. 그런 부분들이 많이 공부가 됐고 극작을 다시 배워보고 싶다. 그런데 4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르겠다. (웃음)

사진제공_한국 콘텐츠 진흥원

글.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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