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아함의 대명사라구요? 하하” 인터뷰 중 평생을 ‘우아함의 대명사’로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미숙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곱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의 얼굴과, 마치 DJ의 멘트처럼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서 ‘우아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연상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 김미숙은 흥미로운 배우다. 이 우아한 배우가 MBC 의 철없는 엄마가 되고, SBS 의 악녀 백성희를 연기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차분하게 자신의 경력과 이미지를 관리할 때 쯤, 김미숙은 왜 새로운 시작에 도전했을까. 김미숙의 우아한 목소리로 활력이 넘치는 요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데뷔 30년 만의 악역 연기로 화제를 얻고 있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던가.
김미숙: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까 다들 내가 악역을 못할 줄 알았나봐. (웃음)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만족해하더라. 그래서 사람들한테 내가 예전에 그렇게 연기를 못했냐고 따지기도 했다. 다들 이런 연기를 과감하게 할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 제작진은 좋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고 그러고. 사실은 김미숙이 악역이 싫어서 반만 하면 어떡할까라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사실 난 그러지 않는데. (웃음)

“올해는 좀 변신하는 해로 생각 했다” 그만큼 당신과 악역의 이미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 것 같다. 30년 내내 김미숙하면 미인, 우아함, 선함 같은 단어들하고만 친하지 않았나.
김미숙: 예전에는 내 이미지를 지키려고 끝까지 노력한 적도 있었다. 변신하라고 하면 변신을 꼭 해야 하나, 자기 색깔이 있으면 됐지 하고 주장하던 적도 있었고. 그런데 살아보니 현실은 우아하고 고상하지만은 않더라. 나도 겉으로는 우아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꼭 백조가 물 아래에서 발을 동동거리듯 노력하고 있었고. 현실이 그런데, 과연 좋은 이미지의 역할만 하는 게 옳은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현실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지 못해봤던 캐릭터에 도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좀 변신하는 해로 생각 했다.

악역 연기를 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나.
김미숙: 연기하면서 이렇게 대본을 오래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익숙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하다 보니까 연기하기가 참 버거운 부분이 있다. 그래서 대본을 읽으면서 캐릭터의 포인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직도 아쉬울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잠도 안 오고, 애써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위로도 해보고.

악역 연기를 하는 걸 보면서 당신에게 저런 표정이 있나 싶을 때도 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때 짓는 표정 같은 거.
김미숙: 맞다. 내가 잘 쓰는 표정이 있고, 나도 모르는 표정이 있다. 승미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는 그래도 엄마의 사랑이 드러나니까 원래 김미숙이 가지고 있던 표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외의 상대를 만날 때는 김미숙을 배제하고, 백성희의 캐릭터가 더 확실히 보여야 해서 그런 부분에서는 말 그대로 연기가 필요하다. 그건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그런 연기에 도전하는 게 힘들지는 않나. 사실 당신은 지금 그렇게 새로운 연기를 찾지 않아도 될 충분한 위치인데.
김미숙: 오히려 재밌다. 나는 늘 좋은 엄마, 착한 엄마만 했으니까. 배우라는 건 남의 삶을 사는 건데 다양하게 하면 재미있지 않나. 노력하면서 내 폭도 넓히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다르게 해보자. 그럼 재밌지 않을까.

“마흔 쯤 되면서 연기에 이런 저런 제안을 하게 되더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김미숙: 요즘 을 하면서 어느 국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옛날에는 왜 그렇게 안했냐고. 사실 과거의 나는 보여주기 싫고, 하기 싫은 걸 적당한 선에서 했었던 것 같다. 어려서는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았다. (웃음) 전에는 “이거다”만 제시했지, “다른 것 일수도 있지 않을까”는 없었다. 그런데 마흔 쯤 되면서부터 “이거 아닐까, 이거 어떨까, 이렇게 해볼까” 이런 식으로 나 스스로에게 제안을 하게 되더라. 그런 당신의 변화가 연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이 영화 아닌가 싶다. 에서 당신은 강인하면서도 아들 문제에 있어서는 신경질적인 부분도 있는 엄마를 연기했다.
김미숙: 을 할 때는 굉장히 바쁠 때였고, 1990년 이후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아서 컴백할 때는 신중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를 읽다 어느 순간 해야지 싶었다. 엄마는 내가 익숙한 배역이기도 했고, 영화라는 작업이 주는 매력에 다시 끌리기도 했고.

에서 주인공 초원의 엄마는 단지 아들에게 헌신적이라기보다 아들을 자기 뜻대로 살게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다소 이기적인 면도 있고. 그런 엄마의 캐릭터는 그 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김미숙: 나는 초원이의 엄마가 아들을 통해서 엄마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아들에게 희생이나 봉사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아이에게 투영하면서 자신의 삶을 사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아들이 옆자리에 없으면 공황상태에 빠질 만큼 허전한 거 아닐까. 실제의 엄마들도 그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을 초원이의 마라톤이나 엄마의 사랑으로만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조금 아쉬울 때도 있다.

엄마에게 모정 외에 자기 인생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 요즘 당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특징인 것 같다. 의 문신자는 자기 인생이 딸보다 더 앞섰고, 백성희가 승미를 선우환과 결혼시키려는 것도 딸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에 맺힌 한 때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김미숙: 내 시대의 엄마들은 자식을 위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예전보다 자신이 원하는 걸 자각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백성희도 자식 때문에 두 번의 재혼을 하지만,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걸 채우지 못해서 그렇게 극악을 떠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은 어머니도 있고. 물론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런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달라진 것 같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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