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어떤 장소는 땅값이나 용도와 상관없이 그 안에 스민 추억 때문에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처음으로 생긴 자기 방이던, 지금은 헤어진 연인과 자주 들렀던 카페이던, 혹은 어릴 때 딱지치기를 하고 놀던 어느 작은 놀이터건. 정든 집을 떠나고, 어릴 적 놀이터 자리에 건물이 들어설 때 드는 아쉬움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추억을 환기할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아닐까. 작년 초 화재로 사라졌던 숭례문 터가 그토록 휑하게 느껴졌던 건 단순히 건물의 유실을 떠나 벽돌과 기와 사이마다 차곡차곡 쌓여있던 추억들까지 날아간 것처럼 느껴져서일 것이다.

7월까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대학로 100번지’展은 아르코미술관의 행정구역상 주소지를 뜻하는 제목 그대로 아르코미술관이라는 장소,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전시와 관람의 추억에 대한 전시다. 이미 검증된 대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보다는 새롭게 검증되어야 할 동시대의 작가들을 발굴해내 관객과 소통할 수 있게 공론장 역할을 해왔던 아르코미술관이기에 환기할 추억들도 풍부하다. 자칫 놓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제2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벽돌에는 아르코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작가의 이름들이 영문으로 투명하게 적혀져 있다. 안에 들어가면 역시 흐릿한 영상과 소리로 미술관을 거쳐 갔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김승영의 작업이 계단과 전시실 사이 벽면에 펼쳐진다. 그 뒤에는 대학로 혹은 아르코미술관에 대한 추억과 감사함을 담은 수많은 작가들의 개별 작품들이 잭슨 홍의 복도 설치 작업 ‘R 30’ 위에 전시되어 다양한 의미를 직조한다. 또 역대 전시 도록의 인사말만 잘라내 책으로 만든 슬기와 민의 ‘인사서’나 미술관 직원들의 직업 만족도와 근무일자 등을 레고로 형상화한 이미혜의 ‘아르코 리서치’는 개별적으로도 무척 흥미로운 텍스트지만 ‘대학로 100번지’展의 전체적 맥락에서 훨씬 풍부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다행히 아르코미술관은 이번 전시 이후에도 대학로 100번지에 그대로 있을 테지만 백지숙 관장의 사직 처리 이후 기획 전시가 아닌 대관 전시 중심으로 진행될 확률이 높다. 때문에 이번 전시는 이 공간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하나씩 지워지기 전에 30년의 소중한 기억을 갈무리하는 하나의 정리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광화문 연가’
1988년│이문세 5집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라는 가사는 아마 어떤 공간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경험에 대한 가장 탁월한 표현일 것이다. 비록 어느 누구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누군가와, 혹은 누군가와 함께한 장소를 통해 공유될 때 더 오랜 생명력을 갖는다. 우연일까. 이제 이 노래는 故 이영훈 작곡가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노래가 되었고 ‘언덕 밑 정동길’을 지나며 사람들은 그를 추억하게 되었다.


2000년│폴 오스터
꼭 그 장소에서 추억을 쌓지 않았다 해도 추억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만으로 소중한 장소가 있다. 에 등장하는 차이니즈 레스토랑 ‘달의 궁전’이 그렇다. 소설은 ‘인간이 달 위를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는 주인공 포그의 말로 시작되지만 정작 그는 단 한 번도 멀리 떠 있는 달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 달로 형상화된, 눈에 보이지만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욕망에 대한 허기를 잠시나마 채우기 위해 그가 향하는 곳은 ‘달의 궁전’이다. 자기 파괴적인 본능에 시달리는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곳에서 ‘문멘’이란 밴드에 소속되었던 죽은 외삼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안정을 얻는다. 물론 과거를 현재에 떠올린다고 그것이 현재의 삶이 될 수는 없지만 그리움에 대한 불완전한 치료제가 되어줄 수는 있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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