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건 결코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이 벽에 부딪히는 순간, 막다른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우리는 때때로 그 위에서 해답을 찾게 된다. EBS 김진혁 PD 역시 그랬다. 영화나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93학번인 그가 대학에 가던 시절에는 연극영화과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차선으로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 2학년 때 영화보다 연애를 하느라 바빴던 그가 군에 갔다 돌아왔을 땐 이미 영화판에 뛰어들기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결국 차선으로 드라마 감독을 선택했지만 정작 그가 합격한 방송사는 드라마를 거의 제작하지 않는 EBS였다. 하지만 지금 EBS 최고의 브랜드가 된 프로그램 가 시작된 것은 바로 그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였다.
“는 드라마의 연장선상에 있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장르로서의 드라마 뿐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갖는 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런 걸 하고자 했던 에너지가 의 구성과 형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처음부터 반전이나 기승전결 같은 플롯을 고민했고 이야기적 구성으로 하나하나를 만들었는데, 실은 드라마에 대한 미련을 엉뚱한 데서 푼 셈이죠. (웃음)” 지난 해 인간광우병에 대한 ‘17년 후’가 방영된 뒤 청와대로부터의 외압 논란의 한가운데서 자기 손으로 기획하고 3년 간 연출해 온 를 떠나야 했던 그는 또 다른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요즘도 수많은 강연 요청과 블로그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교양 프로그램, 다큐멘터리로는 보기 드물게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던 를 연출하는 동안 “작품의 완성도를 만드는 것은 재미와 의미의 적절한 밸런스”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그는 드라마에서도 그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보는 이에게 ‘울림’을 준다고 믿는다. “무엇을 만들든 자신들의 철학을 작품에 담는 게 중요해요. 그건 창작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건 그게 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이에요”MBC
1993년, 극본 박정화, 연출 장용우
“주인공이었던 남녀 중학생이 여행을 갔다가 열차가 끊기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에피소드가 유독 인상적이었어요. 둘이 새벽이 될 때까지 역 벤치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그 시간을 아주 디테일하게 그렸는데 그 동안 오가는 대화와 미묘한 스킨십 같은 게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내용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는 청소년 드라마였지만 현실을 담아내는 데 있어 포장하기보다는 가감 없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리얼리즘을 드러낸 작품이었어요. ‘자, 내일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라는 결론이 아니라 ‘내가 내일도 잘 버텨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끝나는 느낌, 그래서 내가 이해받는 기분이었고 그 시절 다른 청소년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 같아요”
KBS
1996년, 극본 손영목, 연출 김종식 정성효
“가난한 좀도둑의 아들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한수(김민종)는 몰락한 부잣집 딸 운하(김희선)를 사랑하고 동경해요. 그래서 자신의 구원이자 이상인 운하가 위험에 처했을 때 ‘쥐색 스텔라’를 몰고 구하러 가는데 그 때 핸들을 쥔 한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던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한수는 영웅이 아니었고,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도 사실은 두렵다는 걸 보여준 거죠. 나중에 한수는 운하를 구하다가 다쳐서 아버지처럼 다리를 절게 되는 것을 비롯해 는 마지막까지 비극이었어요. 주인공들이 처절하게 죽고,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희망조차 남지 않고 끝나요. 극도로 우울한 이야기지만 리얼리즘이라는 장르를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다는 것, 주인공들 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에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의미가 있었다는 점이 참 좋았어요.”
美 (Battlestar Galactica) Sci Fi
2003년~
“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고 미국 드라마 특유의 스피디한 기법이 사용되지만 이야기 자체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정극에 가까운 작품이에요. 어느 행성이 기계에 점령당해 대통령을 비롯한 통수권자 대부분이 죽게 됐을 때 서열이 낮은 장관 하나만 겨우 살아남아요. 그런데 자기들의 세계가 멸망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를 두고 선거를 하고 그 선거를 위한 참모진까지 꾸리는 거에요.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 ‘그게 인간이다’라는 거에요. 희망이란 쿨하고 산뜻한 것만이 아니라 끈적끈적한 미련이자 욕망이라는 사실, 그게 희망이고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모든 주인공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던지는 질문은 같아요.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의 ‘거대 우주선 시대’ 시리즈도 그런 문제의식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담아내고 싶어서 를 벤치마킹해 만든 작품이었어요.”“하고 싶다기보다는, 해야 해요.”
를 다시 만들고 싶냐는 질문에 김진혁 PD는 대답했다. “하고 싶다기보다는, 해야 해요. 제 손으로 정리하고 나온 게 아니니까요. 언젠가 다시 만들게 된다면 그만두기 전까지 를 확장하고 싶었던 부분을 마무리 짓고 싶어요. 특히 ‘e야기’ 카테고리에서 하고 싶었던 드라마와 ‘beyond’ 카테고리에 담고 싶었던 리얼리즘적인 소재를 좀 더 넓혔으면 해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실’이라고 말하는 이답게 언젠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면 그가 시도하고 싶은 것 역시 리얼리즘 드라마다. “꿈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꿈이 세상과 부딪혀 얼마큼 처참하게 부서지는가를 그려 보고 싶어요. 대신 스타일은 최대한 세련되게. 사람에겐 끔찍한 장면을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거든요. 고통의 실체를 명확히 보고 나면 안심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요즘 같은 때 리얼리즘이 주는 의미와 재미가 더 크지 않을까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는 드라마의 연장선상에 있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장르로서의 드라마 뿐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갖는 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런 걸 하고자 했던 에너지가 의 구성과 형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처음부터 반전이나 기승전결 같은 플롯을 고민했고 이야기적 구성으로 하나하나를 만들었는데, 실은 드라마에 대한 미련을 엉뚱한 데서 푼 셈이죠. (웃음)” 지난 해 인간광우병에 대한 ‘17년 후’가 방영된 뒤 청와대로부터의 외압 논란의 한가운데서 자기 손으로 기획하고 3년 간 연출해 온 를 떠나야 했던 그는 또 다른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요즘도 수많은 강연 요청과 블로그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교양 프로그램, 다큐멘터리로는 보기 드물게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던 를 연출하는 동안 “작품의 완성도를 만드는 것은 재미와 의미의 적절한 밸런스”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그는 드라마에서도 그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보는 이에게 ‘울림’을 준다고 믿는다. “무엇을 만들든 자신들의 철학을 작품에 담는 게 중요해요. 그건 창작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건 그게 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이에요”MBC
1993년, 극본 박정화, 연출 장용우
“주인공이었던 남녀 중학생이 여행을 갔다가 열차가 끊기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에피소드가 유독 인상적이었어요. 둘이 새벽이 될 때까지 역 벤치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그 시간을 아주 디테일하게 그렸는데 그 동안 오가는 대화와 미묘한 스킨십 같은 게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내용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는 청소년 드라마였지만 현실을 담아내는 데 있어 포장하기보다는 가감 없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리얼리즘을 드러낸 작품이었어요. ‘자, 내일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라는 결론이 아니라 ‘내가 내일도 잘 버텨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끝나는 느낌, 그래서 내가 이해받는 기분이었고 그 시절 다른 청소년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 같아요”
KBS
1996년, 극본 손영목, 연출 김종식 정성효
“가난한 좀도둑의 아들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한수(김민종)는 몰락한 부잣집 딸 운하(김희선)를 사랑하고 동경해요. 그래서 자신의 구원이자 이상인 운하가 위험에 처했을 때 ‘쥐색 스텔라’를 몰고 구하러 가는데 그 때 핸들을 쥔 한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던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한수는 영웅이 아니었고,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도 사실은 두렵다는 걸 보여준 거죠. 나중에 한수는 운하를 구하다가 다쳐서 아버지처럼 다리를 절게 되는 것을 비롯해 는 마지막까지 비극이었어요. 주인공들이 처절하게 죽고,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희망조차 남지 않고 끝나요. 극도로 우울한 이야기지만 리얼리즘이라는 장르를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다는 것, 주인공들 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에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의미가 있었다는 점이 참 좋았어요.”
美 (Battlestar Galactica) Sci Fi
2003년~
“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고 미국 드라마 특유의 스피디한 기법이 사용되지만 이야기 자체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정극에 가까운 작품이에요. 어느 행성이 기계에 점령당해 대통령을 비롯한 통수권자 대부분이 죽게 됐을 때 서열이 낮은 장관 하나만 겨우 살아남아요. 그런데 자기들의 세계가 멸망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를 두고 선거를 하고 그 선거를 위한 참모진까지 꾸리는 거에요.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 ‘그게 인간이다’라는 거에요. 희망이란 쿨하고 산뜻한 것만이 아니라 끈적끈적한 미련이자 욕망이라는 사실, 그게 희망이고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모든 주인공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던지는 질문은 같아요.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의 ‘거대 우주선 시대’ 시리즈도 그런 문제의식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담아내고 싶어서 를 벤치마킹해 만든 작품이었어요.”“하고 싶다기보다는, 해야 해요.”
를 다시 만들고 싶냐는 질문에 김진혁 PD는 대답했다. “하고 싶다기보다는, 해야 해요. 제 손으로 정리하고 나온 게 아니니까요. 언젠가 다시 만들게 된다면 그만두기 전까지 를 확장하고 싶었던 부분을 마무리 짓고 싶어요. 특히 ‘e야기’ 카테고리에서 하고 싶었던 드라마와 ‘beyond’ 카테고리에 담고 싶었던 리얼리즘적인 소재를 좀 더 넓혔으면 해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실’이라고 말하는 이답게 언젠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면 그가 시도하고 싶은 것 역시 리얼리즘 드라마다. “꿈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꿈이 세상과 부딪혀 얼마큼 처참하게 부서지는가를 그려 보고 싶어요. 대신 스타일은 최대한 세련되게. 사람에겐 끔찍한 장면을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거든요. 고통의 실체를 명확히 보고 나면 안심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요즘 같은 때 리얼리즘이 주는 의미와 재미가 더 크지 않을까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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