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주세요.” “ㅂ으로 시작하는 영화중에 그런 제목은 없어요.” “그럴리가요! 굉장히 유명한 작품인데.” “잠깐, ㅅ항목에 비슷한 영화가 있네요. .” 중학생 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네임 라벨이 낡아서 흐릿해진 비디오를 들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점원을 얼마나 흉봤는지 모른다.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나서야 영화의 원작인 소설 를 읽었다. 이런 걸작 소설을 이제야 읽다니, SF 소설 마니아들이 나를 아무리 흉본들 할 말이 없다. 그만큼 이 소설은 굉장한 이야기다.

암울한 미래의 지구. 안드로이드를 처리하는 현상금 사냥꾼 릭 데커드. 그리고 피조물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안드로이드들까지 는 영화와 흡사한 설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분명 책장을 덮고 나면 를 봤을 때와 비슷한 주제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 소설은 보다 기묘하고 특별한 여운을 남긴다. 범인은 바로 작품 전반을 휘감고 있는 은근한 유머감각이다. 덕분에 심각한 상황과 무거운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에 책장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온전히 이야기에 빠져 들 수 있다. 비장한 모습으로 독백을 남기던 룻거 하우어의 포스 대신,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데커드의 아내 아이란과 특수자 이지도어가 전하는 메시지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를 읽기 전에 를 볼 필요는 없다. 아니 영화를 보고 괜한 선입견을 갖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대신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작명을 했다는 전자양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의 2집에 있는 ‘무신론자의 가스펠 Pt. 2`라면 더더욱 좋겠다. 다만, 스산한 유머감각의 더블 콤보를 견뎌 낼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 다시 말하지만, 이건 굉장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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