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를 보다보면 번번이 딸아이와 티격태격하게 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저게 말이 돼?”하고 내가 구시렁거리면 딸아이가 “원래 만화에선 더 심한데 뭘. 그렇게 옆에서 자꾸 잡음 넣으려면 아예 보질 말던가” 하며 투덜대는 식이다. 나도 도에 넘치는 이지메라든지 허랑방탕한 재벌 놀음쯤이야 ‘드라마니까’ 하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금잔디(구혜선)네 가족들, 특히 잔디 엄마(임예진)의 어른답지 못한 행보만큼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언제나 ‘엄마’는 나에겐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때로는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 못한다는 어르신들처럼 연기자 임예진 씨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애가 지금 위험하잖아요. 아직 어린 애를 저렇게 방목하면 어쩌자는 거예요”라며 소리치고 싶을 정도니까. 잔디 엄마로 말하자면 고등학생인 딸이 밤늦게 돌아오지 않아도, 외박을 해도, 아예 남자 친구와 해외여행을 떠났다 해도, 찾아 나서기는커녕 기다리는 시늉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 아닌가.

그 예쁜 F4들을 보다 쿠션을 집어던진 사연

보통 엄마 같으면 딸의 얼굴을 볼 때까지 잠 한숨 제대로 못 자련만 오직 부잣집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준표(이민호)의 전화 한통이면 그저 만사 오케이라니. 안쓰러운 건 잔디가 길이 들은 건지 체념을 한 건지, 엄마를 위시한 가족들의 자존심을 바닥으로 내팽개친 언행에도 어이없다는 듯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대거리를 하는 적이 없다는 것. 데이트하러 갈 때는 동생이 더 짧은 치마를 입으라고 권유해도 웃고 넘길 뿐 화 한 번 내지 않는다. 급기야 나는 잔디 부모가 딸과 준표를 한 방에서 재우겠다고 이부자리까지 펴놓던 날엔 열 받아 곁에 있던 쿠션까지 집어 던지며 화를 내고 말았다. 물론 원작 만화를 통해 잔디 엄마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딸을 팔아 평생 편히 살아 볼 마음을 진짜 먹을 줄이야. 잔디 엄마나 아빠에게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글로벌 기업 후계자라는 준표와 함께 할 딸 잔디의 앞길이 걱정이 돼 좌불안석이겠거늘, 어찌 그러냔 말이다.사실 나는 그날 저녁에 연극 을 보러 갔었다. 듣자니 어지간히 눈물 콧물 빼는 이야기라기에 핑계 김에 거기 묻어 실컷 울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준비해간 손수건이 필요할 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대신 우리 엄마와 내가, 또 나와 내 딸아이가 서로를 할퀴며 마음 상하게 할 때와 똑 닮은 대사들이 속속 튀어나와 가슴이 뜨끔했다. 그리고 딸이 지치고 힘들 때 찾아와 기댈 곳이 세상 천지에 엄마 밖에 더 있느냐며, 그래서 시골집을 끝내 지키고 있다는 극중 어머니의 대사를 듣는 순간 “내 어떻게든 힘닿을 때까지 내 딸의 편이 되어 주리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왔거늘 드라마에선 명색이 엄마라는 이가 그런 망측한 행태를 벌이고 있으니 더 기가 막혔던 것 같다. 어른이든 애든 여자가 지치고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라고 하건만, 엄마라는 이가 의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가족들을 부추겨 수시로 사건 사고만 일으키고 있으니 잔디, 그 아이가 얼마나 딱한가 말이다. 그러니 잔디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기대게 되고, 그러다보니 어장관리 한다는 소리까지 듣는 게 아닌가.

잔디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그간 물색없이 아무에게나 자꾸 덥석 덥석 받기만 하는 잔디를 내심 밉상이라 여겼었다. 준표가 퍼부어온 온갖 물량공세야 신데렐라 스토리라 그렇다 쳐도 민서현(한채영)으로부터 드레스 일습이나 가당치 않게 고가인 구두를 받는가 하면, 지후에게도 머리가 덜 말랐다며 씌워준 모자를 비롯하여 두루 신세를 져왔으니까. 입으로는 늘 미안하다, 고맙다, 겸연쩍어 하며 받지만 딱히 보답할 마음을 먹지 않는 잔디가 안타까웠는데 그게 가족 탓이 아닌가 싶다. 엄마의 성정이 워낙 뻔뻔한데다가 아버지나 동생 역시 딸과 누나를 준표에게 넘기려고 하는 마당에 누가 대체 이 아이에게 도리와 배려를 제대로 알려주었겠는가. 이럴 땐 이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만화요, 판타지라는 사실이 오히려 고맙다. 미성년인 딸을 앞세워 티켓 다방을 운영하는 어미가 있다는 기사도 눈에 띄고, 강호순 같은 엽기적 살인마들이 활보하는 흉흉한 세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잔디 엄마 같은 진상 엄마가 존재할 리는 결코 없다고 믿고 싶기에.

정석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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