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은 연일 앞서 방송된 사건들을 뛰어넘는 떡밥들로 세포 분열하며 새 경지를 열고 있다. 전통적인 일일극의 시청자층이 아니었던 젊은 네티즌들도 패러디물을 쏟아내고, 시청률도 30%를 훌쩍 넘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의 뜨거운 논란이 무색할 정도로 은 고전적인 스토리와 설정을 가진 드라마다. 배신당한 아내가 업그레이드한 외모를 무기로 복수한다는 줄기는 여러 영화에서 변주된 바 있고, 시종일관 격앙된 감정선을 악다구니나 눈물로 이어가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일일극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구느님’에 열광하고 ‘애리냔’에게 분노한다. 도대체 무엇이 을 이렇게 뜨겁게 하는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 괴물 같은 드라마의 세계로 위근우 기자와 김선영 TV평론가가 유혹한다. /편집자주
같은 집에서 자란 친자매 같은 친구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하고, 남편은 내연녀 때문에 임신한 아내를 바다에 빠뜨린다. SBS 에 막장 드라마, 소위 ‘막드’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것은 복수를 위해 신분을 바꿔 전 남편을 유혹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더해 과거의 ‘막드’보다 더 독하고 자극적으로 굴기 때문이 아니다. 은 문영남이나 임성한 같은 작가들의 독한 드라마 안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클리셰와 캐릭터를 바탕으로 자체 완결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비현실적 캐릭터들이 개연성 있게 꾸려나가는 이야기첫 회에 은재(장서희)의 모든 걸 무너뜨리려고 마음먹은 애리(김서형)가 귀국하고, 최근에는 역으로 복수심을 품은 은재가 소희의 신분으로 전 남편 교빈(변우민)과 키스할 때까지 은 한 회도 쉬지 않고 극적인 에피소드들을 쏟아냈다. MBC 과 KBS 이 그러했듯, 이런 쉼 없는 갈등은 종종 일일드라마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이 다른 점은 그 과정에서 개연성을 희생하는 경우가 의외로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귀 얇은 미인(금보라)은 애리의 거짓말을 들을 때마다 은재에 대한 불만에 호들갑을 떨지만 그걸 빌미로 이혼을 요구하진 않는다. 교빈과 은재의 이혼이 공론화되기까진 적어도 강재(최준용)가 교빈과 애리의 밀회를 발견하고 매부인 교빈을 반죽음 상태로 두들겨 패는 그럴 듯한 과정이 전제된다. 그럼에도 자극적인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 사건을 일으키는 등장인물의 성격 때문이다.
단순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와 비현실적 캐릭터들이 개연성 있게 꾸려나가는 이야기는 다르다. 여자의 엉덩이나 다리만 보면 이성의 끈을 놓는 교빈이나, 극단적 소유욕의 사이코 패스 애리, 죽은 딸 소희에 대해 집착하는 민여사(정애리)처럼 속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애리와 교빈이 은재를 몰아내는 과정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은재가 민여사 밑에서 복수를 위한 유혹의 기술을 익히는 모습은 이런 극단적 캐릭터들의 욕망이 부딪힐 때 벌어질 수 있는 ‘있을 법한’ 순간 들이다. 이것은 캐릭터와 세계관이 형성되면 그 안의 자체 완결적인 법칙으로 움직이는 만화적 세계와 비슷하다. 만화 이 조커와 투 페이스, 캣우먼처럼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벌이는 역시 ‘있을 법한’ 이야기인 것처럼. 문제는 이러한 자체 완결적인 세계를 독자 혹은 시청자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인데 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막드’의 계보에 올려놓으며 이런 세계관을 선취했다.
‘막드’ 라는 장르의 결과물즉 시놉시스 전체를 요약해 지은 제목처럼, 이 드라마는 신분을 바꿔 남편을 유혹한다는 도발적인 설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SBS 나 MBC 같은 작품들을 통해 형성된 학습효과를 자기 것으로 가져온다. 이 좋은 드라마는 아닐지라도 영리한 드라마인 것은 이런 ‘막드’의 설정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안에서 나름의 룰을 만들고 그걸 지키는 방식으로 그럴듯한 어떤 가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은 오랜 시간 누적된 ‘막드’의 공식이 삶의 재현 혹은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목적을 넘어 자체적 세계 안에서 변주될 수 있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일지 모른다.
글 위근우
SBS 에서 ‘아내’라는 말은 일종의 텅 빈 기표다. 남편 교빈(변우민)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아내1’ 은재(장서희)는 추방, 살해당하고, 그 공백을 ‘아내2’ 애리(김서형)가 채우자마자 이 현대판 ‘푸른 수염’은 또 다른 ‘아내3’을 욕망한다. 결국 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복수극인 동시에, 그녀가 텅 빈 기표 안에 자신의 진짜 이름을 다시 채워 넣으려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도 밖으로 추방된 아내의 유령방영 초기 시드니 셀던 원작의 TV시리즈 와 스토리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 드라마 속 복수담의 원형은 그보다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로 억울하게 죽은 아내의 원귀가 한풀이하는 우리 옛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괴담은 기혼여성의 어두운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은유로 기능한다. 즉 가족제도 밖으로 추방당했던 여성의 억압된 욕망과 분노가 유령으로 귀환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은 이를테면 현대판 여귀 복수 서사인 셈이다. 한 집안의 사랑받는 딸이자 재능 있는 미술 전공자였던 은재는 결혼과 동시에 한 집안의 아내이자 엄마, 며느리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밥 시켜먹는 몸종”이자 “돈 안 받는 가정부”로 지내왔던 그녀는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아이를 유산하며,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면서 정체성을 차례대로 제거당하고 마침내 유령이 된다.
에서 은재의 본격적 수난이 애리의 귀환과 동시에 시작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흔해빠진 아내라는 이름도 얼마나 섹시하고 유혹적인지” 보여주는 그녀는 일견 교빈의 욕망이 소환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가 은재의 자리를 빼앗고 새로운 아내가 되어가는 방식은 무척 교묘하다. 애리는 부엌에서부터 침실까지 은재의 영역을 차근차근 공략하며 그녀를 몰아낸다. 그녀는 단지 교빈만이 아니라, 완전한 아내의 자리 그 자체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리는 교빈의 욕망이 불러낸 단순한 팜므파탈만은 아니다. 은재와 선악의 데칼코마니와도 같은 관계인 애리는 오히려 “은재의 그림자”이자 어두운 자아에 더 가깝다. ‘은재처럼 살지 않겠다’ 선언하고, 시부모에게도 할 말은 다하며, ‘교빈의 버릇을 반드시 고쳐놓겠다’는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에는 분명 단순한 악녀 클리셰를 넘어 은재의 억눌린 자아가 정반대의 극단화된 형태로 발현된 것과 같은 쾌감과 공감을 주는 지점이 있다.
착한 여자 – 나쁜 여자의 대립 구도를 넘어
그러나 애리가 ‘아내2’가 된 순간, 그녀의 노골적인 욕망 역시 가족 제도와 불화한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은재와 비교하고, 시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녀를 진짜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교빈은 다시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위기에 처한 애리 역시 은재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만이 살아갈 이유라고 말한다. 이 주는 복수의 쾌감이 모호해지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은재와 애리를 ‘아내’로 호명하고 밀어냈던 주체는 결국 기존의 억압적인 가족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재의 복수가 단순히 ‘나쁜 여자’ 애리와의 대결로 압축되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장 피해야 할 위험요소이다. 결국 이제 막 복수의 서막을 올린 이 유념해야 할 것은 독한 복수극의 대장정을 마치고 은재가 극 초반 자신이 죽을 뻔했던 바다 위로 외쳐 보냈던 ‘구은재’라는 이름, 그 추방당한 진짜 욕망을 찾아야 한다는 결말을 잊지 않는 것이다.
글 김선영
같은 집에서 자란 친자매 같은 친구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하고, 남편은 내연녀 때문에 임신한 아내를 바다에 빠뜨린다. SBS 에 막장 드라마, 소위 ‘막드’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것은 복수를 위해 신분을 바꿔 전 남편을 유혹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더해 과거의 ‘막드’보다 더 독하고 자극적으로 굴기 때문이 아니다. 은 문영남이나 임성한 같은 작가들의 독한 드라마 안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클리셰와 캐릭터를 바탕으로 자체 완결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비현실적 캐릭터들이 개연성 있게 꾸려나가는 이야기첫 회에 은재(장서희)의 모든 걸 무너뜨리려고 마음먹은 애리(김서형)가 귀국하고, 최근에는 역으로 복수심을 품은 은재가 소희의 신분으로 전 남편 교빈(변우민)과 키스할 때까지 은 한 회도 쉬지 않고 극적인 에피소드들을 쏟아냈다. MBC 과 KBS 이 그러했듯, 이런 쉼 없는 갈등은 종종 일일드라마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이 다른 점은 그 과정에서 개연성을 희생하는 경우가 의외로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귀 얇은 미인(금보라)은 애리의 거짓말을 들을 때마다 은재에 대한 불만에 호들갑을 떨지만 그걸 빌미로 이혼을 요구하진 않는다. 교빈과 은재의 이혼이 공론화되기까진 적어도 강재(최준용)가 교빈과 애리의 밀회를 발견하고 매부인 교빈을 반죽음 상태로 두들겨 패는 그럴 듯한 과정이 전제된다. 그럼에도 자극적인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 사건을 일으키는 등장인물의 성격 때문이다.
단순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와 비현실적 캐릭터들이 개연성 있게 꾸려나가는 이야기는 다르다. 여자의 엉덩이나 다리만 보면 이성의 끈을 놓는 교빈이나, 극단적 소유욕의 사이코 패스 애리, 죽은 딸 소희에 대해 집착하는 민여사(정애리)처럼 속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애리와 교빈이 은재를 몰아내는 과정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은재가 민여사 밑에서 복수를 위한 유혹의 기술을 익히는 모습은 이런 극단적 캐릭터들의 욕망이 부딪힐 때 벌어질 수 있는 ‘있을 법한’ 순간 들이다. 이것은 캐릭터와 세계관이 형성되면 그 안의 자체 완결적인 법칙으로 움직이는 만화적 세계와 비슷하다. 만화 이 조커와 투 페이스, 캣우먼처럼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벌이는 역시 ‘있을 법한’ 이야기인 것처럼. 문제는 이러한 자체 완결적인 세계를 독자 혹은 시청자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인데 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막드’의 계보에 올려놓으며 이런 세계관을 선취했다.
‘막드’ 라는 장르의 결과물즉 시놉시스 전체를 요약해 지은 제목처럼, 이 드라마는 신분을 바꿔 남편을 유혹한다는 도발적인 설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SBS 나 MBC 같은 작품들을 통해 형성된 학습효과를 자기 것으로 가져온다. 이 좋은 드라마는 아닐지라도 영리한 드라마인 것은 이런 ‘막드’의 설정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안에서 나름의 룰을 만들고 그걸 지키는 방식으로 그럴듯한 어떤 가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은 오랜 시간 누적된 ‘막드’의 공식이 삶의 재현 혹은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목적을 넘어 자체적 세계 안에서 변주될 수 있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일지 모른다.
글 위근우
SBS 에서 ‘아내’라는 말은 일종의 텅 빈 기표다. 남편 교빈(변우민)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아내1’ 은재(장서희)는 추방, 살해당하고, 그 공백을 ‘아내2’ 애리(김서형)가 채우자마자 이 현대판 ‘푸른 수염’은 또 다른 ‘아내3’을 욕망한다. 결국 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복수극인 동시에, 그녀가 텅 빈 기표 안에 자신의 진짜 이름을 다시 채워 넣으려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도 밖으로 추방된 아내의 유령방영 초기 시드니 셀던 원작의 TV시리즈 와 스토리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 드라마 속 복수담의 원형은 그보다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로 억울하게 죽은 아내의 원귀가 한풀이하는 우리 옛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괴담은 기혼여성의 어두운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은유로 기능한다. 즉 가족제도 밖으로 추방당했던 여성의 억압된 욕망과 분노가 유령으로 귀환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은 이를테면 현대판 여귀 복수 서사인 셈이다. 한 집안의 사랑받는 딸이자 재능 있는 미술 전공자였던 은재는 결혼과 동시에 한 집안의 아내이자 엄마, 며느리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밥 시켜먹는 몸종”이자 “돈 안 받는 가정부”로 지내왔던 그녀는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아이를 유산하며,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면서 정체성을 차례대로 제거당하고 마침내 유령이 된다.
에서 은재의 본격적 수난이 애리의 귀환과 동시에 시작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흔해빠진 아내라는 이름도 얼마나 섹시하고 유혹적인지” 보여주는 그녀는 일견 교빈의 욕망이 소환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가 은재의 자리를 빼앗고 새로운 아내가 되어가는 방식은 무척 교묘하다. 애리는 부엌에서부터 침실까지 은재의 영역을 차근차근 공략하며 그녀를 몰아낸다. 그녀는 단지 교빈만이 아니라, 완전한 아내의 자리 그 자체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리는 교빈의 욕망이 불러낸 단순한 팜므파탈만은 아니다. 은재와 선악의 데칼코마니와도 같은 관계인 애리는 오히려 “은재의 그림자”이자 어두운 자아에 더 가깝다. ‘은재처럼 살지 않겠다’ 선언하고, 시부모에게도 할 말은 다하며, ‘교빈의 버릇을 반드시 고쳐놓겠다’는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에는 분명 단순한 악녀 클리셰를 넘어 은재의 억눌린 자아가 정반대의 극단화된 형태로 발현된 것과 같은 쾌감과 공감을 주는 지점이 있다.
착한 여자 – 나쁜 여자의 대립 구도를 넘어
그러나 애리가 ‘아내2’가 된 순간, 그녀의 노골적인 욕망 역시 가족 제도와 불화한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은재와 비교하고, 시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녀를 진짜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교빈은 다시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위기에 처한 애리 역시 은재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만이 살아갈 이유라고 말한다. 이 주는 복수의 쾌감이 모호해지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은재와 애리를 ‘아내’로 호명하고 밀어냈던 주체는 결국 기존의 억압적인 가족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재의 복수가 단순히 ‘나쁜 여자’ 애리와의 대결로 압축되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장 피해야 할 위험요소이다. 결국 이제 막 복수의 서막을 올린 이 유념해야 할 것은 독한 복수극의 대장정을 마치고 은재가 극 초반 자신이 죽을 뻔했던 바다 위로 외쳐 보냈던 ‘구은재’라는 이름, 그 추방당한 진짜 욕망을 찾아야 한다는 결말을 잊지 않는 것이다.
글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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