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신 강마에께서는 “클래식은 귀족의 음악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고전(classic)이 꼭 귀족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서양회화의 고전인 렘브란트의 그림은 당시 네덜란드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상인 계급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돈은 잘 벌었을지는 몰라도 고귀함 같은 고전적 가치와는 거리가 있던 이들 신흥 계급의 모습은 렘브란트의 이나 같은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붓을 든 사람이었고, 이것은 렘브란트라는 대가의 작업을 이해하기 전에 미리 쫄 필요는 없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재능을 필부를 위해 희생했단 건 아니다. 만약 그가 귀족이나 성직자를 위해 그들의 위대함을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낸 그림을 그려야 했다면 오히려 이나 처럼 탁월한 초상화를 남기진 못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위대한 면은 대상의 현재 지위에 어울리는 외형적 화려함을 드러내기보다는, 대상의 내면에 침잠해 표정과 주름 하나하나에 담긴 대상의 성격과 삶의 태도, 인생의 굴곡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유독 자신의 모습을 자주 그렸던 그의 자화상 중 죽기 1년 전 완성한 마지막 이 가장 탁월한 걸작인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테크닉의 문제를 떠나 이 그림에는 젊은 시절 상업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잘나가던 화가였다가 말년에는 빚더미에 올라 집과 수집품을 팔아야 했고, 죽은 뒤에는 헌 옷 몇 벌과 화구만 남겨야 했던 어떤 천재의 굴곡진 인생이 그대로 담겨있다.


08. 12. 10 ~ 09. 03. 13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
피터 파울 루벤스는 렘브란트의 바로 윗세대 플랑드르 회화의 대가다. 시대적으로도 공간적으로 인접해있고, 금속의 광택이나 천의 질감을 재현하는 테크닉에 있어 비슷한 점도 있지만 둘의 그림과 삶은 정반대였다. 신흥 부르주아를 그린 렘브란트와 달리 루벤스는 왕족과 성직자들의 신임을 얻으며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주제들을 역동적인 바로크적 구도와 필치로 화려하게 그려냈다. 돈 없고 인기 없어 비참했던 말년을 보낸 렘브란트와 달리 이 수완 좋은 대가는 가톨릭 사제들과 왕족의 유대를 끈끈하게 유지하고 가끔은 중요한 외교 업무를 성공시키며 귀족 같은 대우를 받았다. 최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을 산 두 천재를 비교해보는 건 어떨까.


베르메르 반 델프트
거장의 뛰어난 작업들은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어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렘브란트 회화의 유산을 이어받은 네덜란드의 또 다른 대가로는 베르메르 반 델프트를 꼽을 수 있다. 걸작 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는 부드러운 윤곽선으로 눈의 긴장을 풀어주면서도 대상의 입체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그린 영화 는 화가가 겪는 삶의 순간순간이 어떻게 화폭에 담기는지 보여주는 괜찮은 픽션이다. 또한 베르메르 뿐 아니라 램프란트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복식을 실사로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2월 26일까지 진행되는 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비록 을 제외하면 모두 에칭 작품 밖에 없지만 그 때문에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이유는 없다. 훨씬 전 세대인 마르틴 숀가우어나 알브레히트 뒤러처럼 그는 판화에 있어서도 손꼽히는 대가였다. 자화상을 좋아하는 화가답게 , 등의 자화상 에칭이 많이 소개되지만 이들 중 단 한 작품을 고르라면 을 추천하겠다. 이 정교한 작품에 그어진 무수한 선과 스크래치를 보며 우리는 렘브란트가 겪었던 ‘노가다’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굳이 테크네라는 예술의 어원을 따지지 않더라도 예술은 다분히 기술적이고 육체적인 작업이다. 그것은 아무리 탁월한 예술가라고 해도 자신의 육체적 한계, 공간적 한계, 시대적 한계 안에서 작업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때문에 함께 전시되는 동시대 화가인 안토니 반 다이크의 초상화나 얀 다비츠존 더 헤임의의 정물화를 통해 렘브란트가 호흡했던 예술계의 유산을 확인하는 것도 렘브란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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