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방문 첫째날
깊이 숨을 들이쉬니 고향의 공기가 폐에 가득 차오른다. 이 얼마만의 휴식인가. 그리고 얼마 만에 돌아온 고향인가. 어머니가 한상 가득 차려 주신 저녁을 먹고 나니 집에 돌아왔다는 현실감이 뼛속 깊이 사무친다. 그토록 그리웠던 것은 어쩌면 집이 아니라 어머니였을지도 모르겠다. 막내인 내가 집을 떠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편안해 지셨을 어머니. 더 이상 책상머리에서 졸고 있는 수험생에게 간식을 챙겨주거나, 군대 간 아들을 위해 새벽 기도를 하거나, 취업에 실패 하고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온 장정을 옷 갈아 입혀 자리에 제대로 누이지 않아도 되는 어머니의 일상은 이제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할 것이다.
“오래간만에 엄마가 해준 밥 먹으니까 맛있네.” 거실 소파에 모로 누운 어머니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넨다. 그러나 대꾸가 없다. 벌써 잠이 드셨나. 괜한 찬거리를 마련하느라 고단하셨던 모양이다. 틀어 놓은 TV에서는 초저녁부터 성인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붕가붕가 하는가 보다”라니,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노골적인 대사에 얼굴이 붉어진다. 채널을 바꾸려고 리모컨을 집어 드는데, 어머니가 벌떡 몸을 일으키신다. “보고 있는데 왜 그러니?” 9시도 안된 시간부터 어머니는 죽은 듯이 집중하면서 성인물을 보고 계셨단 말인가! 놀란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어머니는 겸연쩍게 웃으시며 변명처럼 말을 이으신다. “친구들이 하도 얘기들을 하길래 뭔가 싶어서…… 어제 수빈이가 찾아오는 데서 끝나가지고, 오늘 그 다음만 보려고 그랬는데……” 마침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오시며 한마디 거드신다. “늬 엄마도 늙었어. 요즘 일일 연속극 본다고 나는 리모컨에 손도 못 대게 한다. 할망구 된 거야.” 삐죽 눈을 흘기는 어머니. 눈가가 여전히 곱다.

고향 방문 둘째날
오래간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했다 돌아오니 어머니는 TV 앞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고 계신다. 눈은 TV 화면에 고정되어 있지만, 어머니의 손놀림은 정확하고도 신속하다. 손마디에 눈이 달린 듯 살림에 익숙해지는 동안 어머니의 청춘은 닳아 없어져 버렸고, 당신께 남은 것은 주름살과 흰머리뿐이다. 울컥하는 마음에 눈가가 뜨거워지려는데, 마침 어머니가 기척을 느끼셨는지 나를 부르신다. 옆에 앉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소녀처럼 조근조근 이야기를 시작 하신다. “얘가 쟤 오빠랑 결혼 할 뻔 했거든. 근데 쟤랑 오빠는 친 남매가 아니라서 사실 결혼 시켜도 될 뻔 했는데, 얘네 오빠하고 쟤가 결혼을 해야 하니까 작가가 그렇게 쓴 것 같아.” 화면에 낯선 배우들이 비칠 때 마다 어머니는 턱짓을 하며 열심히 설명을 하시지만, 들을수록 이야기는 해괴하기만 하다. “나도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했거든. 그런데 한 일주일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대충 알겠더라.” 이미 콩나물은 모두 깨끗하게 다듬어 졌지만 어머니는 무엇에 홀린 듯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신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나올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TV에서 혀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 남자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이 엄동설한에 새볏 씨를 밖에서 이불 빨래를 시키실 수가 있어요!”

고향 방문 셋째날
낮잠에서 깨고 보니 시계는 벌써 여덟시 삼십분. 하루 종일 어머니가 챙겨주신 간식을 먹어댔건만 다시 배가 출출하다. 방문을 열자 “밥 먹어야지?”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도 난다. 그러나 식탁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어머니는 어제와 마찬가지의 모양으로 TV 앞에 앉아 계신다. “너 먹을 밥 떠 가지구 와. 오늘 아빠 늦게 오신대.” 어머니는 작은 소반 위에 비빔밥 그릇을 하나 놓고 계셨다. 아버지가 늦으시는 날이면 언제나 이렇게 홀로 저녁을 해결하셨겠지. 그때, 무엇에 분노하셨는지 어머니가 숟가락을 손에 든 채로 언성을 높이신다. “아, 친엄마가 있는데 왜 저 여자한테 준다는 거야!” 때마침 퇴근하신 아버지가 그런 엄마를 향해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신다. “여보, 또 그 드라마 보는 거요? 너는 내 골수? 저런 말도 안되는 게 뭐가 재밌다고!” 매섭게 쏘아 보는 눈길과 달리 어머니의 목소리는 의연하기만 하다. “현실에서는 더 한 일도 일어나는 법이에요.”고향 방문 넷째날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그럴 수도 있다뇨. 아무리 그래도 핏줄인데!” “어허. 이 사람아, 한 번 끊어진 인륜은 천륜이 아니라서 그런 거야. 결국 맺어진 사람이 천륜인 거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이 이렇게 격앙된 목소리로 다투는 모습은 처음이다. “당신은 사람이 어쩜 그렇게 매정해요. 아무리 그래도 친엄마는 무시할 수 없는 거예요.” “스스로 끊은 인연에는 아무런 권리가 없는 거요.” 눈물이 날 것 같다. 서른이 다 되어 이렇게 나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가. 짧은 순간이지만 결심은 뚜렷하다. 어서 뛰어 나가서 나에게 어머니는 한 분 뿐이라고 말하며 어머니를 안아드려야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래도 그 여자가 새벽이한테 한 짓이 있는데, 그건 아니죠. 그리고 난 호세한테도 좀 실망이야.” 조금 더 자는 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외로움. 그것이다. 어머니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다정하게 이야기 들어 주는 법 없는 아버지나, 내일 서울로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나나 어머니에게 무심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둘이 데이트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에 저녁을 사드리겠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선뜻 내켜 하시지 않는 눈치다. “저녁을? 꼭 나가서 먹어야 하니? 멀리 안 갈 거지?” 당신 아들도 그 정도 돈은 쓸 수 있다고, 나간 김에 옷도 한 벌 사 드리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좀처럼 그러자고 나서지를 않으신다. “어제…… 새벽이 친엄마가 시어머니 찾아오는데 딱 끝났거든.” 아, 그놈의 드라마는 왜 꼭 누가 누굴 찾아오는 데서 끝난단 말인가. “엄마, 그러지 말고 나가서 먹어요.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 축구 한일전 중계 때문에 드라마 안한대요.” 잘 달래며 외투를 챙겨 드리는데, 어머니의 어깨가 축 쳐진다. 어쩐지 두 볼이 창백해 진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드라마를 안 한다구? 오늘이 금요일인데? 그럼 다음 주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지금 둘 다 백혈병인데?” 어머니는 소파 위로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리신다. 국가 대표 축구 선수들을 만나면 머리에 핵꿀밤을 한 대씩 먹일 듯 어머니의 주먹이 조용히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본다.

고향 방문 다섯째날
역까지 따라 나오신 어머니는 새벽부터 준비 하신 샌드위치를 굳이 내 가방 속에 넣어 주신다. 명절이나 되어야 다시 볼 아들의 얼굴을 그새 잊을까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이 거칠어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 했다. 급히 플랫폼으로 들어서는데, 어머니가 문득 내 팔을 잡으신다. “간밤에 꿈을 꿨거든.” 어머니의 얼굴에 강한 결의가 스친다. “다 잘 될 것 같아.” 어머니의 단정한 입매에 자애로운 미소가 번진다. “꿈에 호세가 나왔는데, 호세랑 새벽이 친엄마랑 골수가 맞는 거 있지!” 결국, 나는 이성을 잃는다. 며칠간 담아 두었던 고향의 공기를 남김없이 뱉어 낼 듯한 기세로 있는 힘껏 어머니를 향해 외친다. “어무니, 정말 왜이러세요오오오오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