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작고한 한 원로 무용가가 “고통을 수반하지 않은 건 예술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얼마 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는 사진에 담긴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보고 있자면 그 원로 무용가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천재성을 타고난 무용수라 해도 정상의 발레리나가 되기까지는 토슈즈가 주는 극심한 고통이 필수라는 걸 한 장의 사진이 증명하고 있으니까. 하긴 KBS 에서 백무(김영애)도 “예인에게 가장 중요한 벗은 바로 고통이다”라는 말을 남긴 걸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과 고통이 한 몸이라는 점은 일치하나보다. 그냥 연습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뜻만은 아니다. 예술가가 치열하게 연습하며 고통을 느낀 만큼 그것이 결과물에 그대로 담겨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혼’이 담긴다는 것은 그런 뜻일 것이다. MBC 에서도 강마에(김명민)가 워낙 치열하게 연습한 탓에 그의 지휘가 ‘긴장의 미학’을 얻게 되지 않나. 비단 순수 예술만이 아니다. 대중음악이나 영화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가장 상업적이라는 아이돌 가수들만 해도 그렇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다던데…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아이돌 가수라 하면 잘 생긴 얼굴로 인기를 끈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어디 그런가. 얼마 전 MKMF 시상식에서 신인상의 샤이니부터 대상 수상의 빅뱅, 원더걸스, 동방신기까지, 모든 출연진이 수준급 무대를 선보여 화제가 됐는데, 그만큼 요즘 아이돌 가수들은 어린나이부터 엄청난 노력을 한다. 예전에는 립싱크 논란이나 무대가 엉성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반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방신기가 라이브로 그 무대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몇 년을 고생했을 것인가. 이 같은 성과를 이루기까지 나이 어린 그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치열한 노력이 느껴지는 그들의 무대가 더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그런데 요즘 TV를 보면 어린 아이돌보다도 못한 연예인들이 어찌나 많은지. 특히 오락 프로그램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최근 MBC 의 ‘명랑독서토론회’에 출연한 가수 김흥국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초대된 스타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출연진들이 미리 책을 읽고 와서 독서토론을 펼치는 코너인 만큼 프로그램인 만큼 책을 완독하고 와야 마땅하거늘, 김흥국은 누가 봐도 제대로 읽지 않은 티가 났다. 더구나 그날 초대된 가수 백지영이 추천한 최영미 작 라는 시집은 90년대에 발간된 책으로 김흥국 연배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으로 채워져 있건만, 그는 토론에 참여하기는커녕 방송 내내 “언제 끝나느냐”는 투정만 부리고 있었다. 만약 나이 어린 인기 연예인이 그런 행태를 보였다면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찰나의 웃음이 아닌, 시청자와 후배들에 대한 예의도 생각해 봅시다

물론 MBC 에서 이하늘이 에 함께 출연하는 신정환에 대해 ”책을 읽지 않고 나온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오락 프로그램에서 무슨 치열한 노력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정환은 책을 읽지 않는 대신 오락 프로그램의 콘셉트에 맞춰 최대한 웃음을 전하려 노력하지 않는가. KBS 에서 탁재훈, 고영욱과 함께 출연했던 신정환은 그들 사이에 앉아 토크를 적절히 주고 받으며 프로그램 초반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런 진행능력은 그만큼 신정환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한 유재석이 MC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는 익히 알려지지 않았나. 무대 울렁증이 있던 유재석은 말을 잘하기 위해 오락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보며 ‘말을 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고 하나. 그런데 하물며 방송경력 20년이 넘는 김흥국이 이런 성의 없는 방송을 하는 것을 보니 그와 동갑내기인 내가 다 화끈해진다.

가끔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가수나 연기자는 놀러 가는 기분으로 출연한다지만, 방송이 전문인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기본적인 노력은 했어야 하지 않나.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는 패널 연예인들에게 예술성, 작품성 운운하자는 얘기가 아니고 고통을 수반해달라는 얘기도 아니다. 나이 많아 감이 떨어졌다는 소릴 듣는 처지라 해도, 아직 연예인이라는 타이틀로 ‘예’자를 달고 있다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주는 것이 시청자와 후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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