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로 열연하는 배우 황정민. / 제공=샘컴퍼니

“내 발아,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눈을 반쯤 감은 배우 황정민이 객석을 가로질러 더듬더듬, 그러나 결연하게 걸어나갈 때 극장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관객들은 그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숨을 죽인 채 바라봤다. 연극 ‘오이디푸스'(연출 서재형)의 마지막 장면이다.지난달 2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린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해 그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버려졌지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컴컴한 배경이 극의 분위기를 나타내며, 관객을 더욱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자신에게 내려진 비극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강박증을 보이는 오이디푸스(황정민)의 불안한 눈빛으로 출발한다. 이어 자신의 과거를 파헤치며 진실을 알아가는 오이디푸스의 처절한 절규에서 극은 정점을 찍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해 그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저주와도 같은 신탁. 가까스로 피했다고 여겼지만 그럴수록 비극의 그림자는 더욱 가깝고 짙게 오이디푸스를 감쌌다. 결국 신탁대로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울부짖는 오이디푸스의 절절한 외침이 흐른 뒤 “나는 살았고 그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놓는 오이디푸스의 처연한 눈빛이 관객들의 가슴에 박힌다.
배우 황정민. / 제공=샘컴퍼니

참다못해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으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려는 오이디푸스는 또 한 번 묻는다. “내 발아,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라고.

서재형 연출가는 ‘오디디푸스’를 단순히 자극적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았다. 신탁에 얽매인 채 “엄마”를 애타게 부르짖는 오이디푸스의 삶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개척해온 인간의 동력, ‘인간이 의지를 갖는 순간’을 들여다보게 했다. 더불어 ‘오이디푸스를 악인으로만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던진다.뛰어난 공간 활용 능력으로 호평받는 정승호 무대 디자이너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과하지 않으면서도 웅장하게 표현했다. 김영빈 조명 디자이너와 조윤형 소품 디자이너 등은 목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오카스테(배해선)의 모습을 보여줄 때, 무대를 붉게 물들이며 극적 효과를 높였다.

무엇보다 ‘오이디푸스’의 맛을 살린 건 황정민의 열연이다.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가도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온화한 표정을 짓고,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어린아이처럼 울다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의 발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쓸쓸한 눈빛까지. 90분 동안 쉬지 않고 무대 위를 바쁘게 오가며 오롯이 오이디푸스의 삶을 살았다. 황정민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까지 오이디푸스의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오이디푸스의 치부까지 훑은 관객들은 그가 더듬거리며 객석을 가로질러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그저 숨죽인 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오는 24일까지.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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