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정중헌]
지난 4일 폐암으로 별세한 배우 신성일의 발인식이 6일 오전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엄수됐다. /이승현 기자 wizard333@

신성일 선생님의 빈소에 들어서며 많은 영상이 떠올랐지만 저는 스타, 배우보다도 인간적인 선생님과의 추억들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선생님이 교도소에 계실 때, 기자인 저는 신문에 “죄는 미워도 영화로 만인의 사랑을 받은 한국 최고의 스타임은 참작해야 한다”는 취지로 칼럼을 썼지요. 그때 선생님은 “못 보던 책도 많이 읽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편지를 제게 보내셨습니다.출소 다음 날 이촌동 집에서 선생님과 함께 한 점심 자리에서 “뭘 처음으로 하고 싶으냐”고 제가 물었더니 선생님은 주저 없이 “미장원에 가서 베토벤 머리를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윤정희 백건우 부부가 면회 왔을 때 놓고 간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에 감명 받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요.

지난해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 행사에 참석한 배우 신성일(가운데)과 평론가 정중헌(맨 왼쪽). /사진제공=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선생님은 3년 전 평론가, 기자 5명과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영사모)을 하자고 하셨지요. 그간 스물다섯 번의 모임을 ‘스타’ 신성일과 함께 했는데, 선생님이 별들의 고향으로 떠난 빈소에서 가진 26회 모임은 황망하고 허전했습니다.선생님은 모임 장소로 데뷔 시절 맛있게 드셨던 무교동 부민옥이나 충무로 진고개를 좋아하셨지요. 만날 때마다 그곳 종업원들과 사진을 찍고 격려해 주시던 모습, 선합니다.

모임에서 선생님은 영화사에 기록되지 않은 일화들을 들려주셨지요. 영화 인생 60년의 톱스타 신성일의 그 시절 그 추억, 영화동네 사람들 이야기는 또 한 편의 영화처럼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연기 지도를 한다면서 자행된 영화계 관행은 잘못이라며 불같이 화를 내시던 모습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모임 후 미술관이나 서점에 가는 걸 좋아하셨지요.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명화를 보여주시며 직접 사주신 도록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보문고에서 일행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가슴 가득 책을 사들고 와 만면에 짓던 웃음도 잊지 못할 겁니다.
고(故) 신성일의 히트작 ‘맨발의 청춘’의 한 장면/사진제공=영화진흥위원회

신성일 선생님은 507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대배우이고 화려한 인생을 산 스타이기도 하지만, 제게는 친형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후배 영화인이나 기자가 안 보이면 안부를 묻고 연락을 취해보라고 채근하셨지요. 언제 어디서나 팬들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사진 찍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할리우드 키드 세대인 제게 신성일이라는 배우는 선망 그 이상이었습니다. 헤어스타일, 청바지, 가죽점퍼, 화려한 셔츠들… 영사모 모임에서 1960년대에 어떻게 그런 멋진 의상들을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미8군에서 본 잡지로 직구도 하고 홍콩으로 날아가 사오기도 했다고 하셨지요.선생님은 평생 ‘스타’로 사셨지만 제가 곁에서 본 선생님은 참으로 소박했습니다. 동부이촌동 세탁소는 50년 넘게 옷을 맡겼고, 양복이며 구두며 재래시장 반찬가게까지 단골만 찾곤 하셨지요. 이제 그런 소탈한 모습을 볼 수 없어 더 허탈해집니다.

선생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저는 두 가지를 염원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생전 선생님과 의논했던 팬클럽을 만드는 일이고, 또 하나는 평생의 꿈이셨던 ‘신성일 영화박물관’이 경북 영천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정중헌(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정중헌은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제14대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협회 원로회원이다. 고(故) 신성일이 만든 영화연구단체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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