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슬기 기자]
신수원 감독/사진제공=리틀빅피처스

“사람이 순수할 수만은 없잖아요.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서로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이죠. 하지만 나뭇가지처럼 ‘공존하는 삶을 살자’라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가장 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아가자’라는 거죠.”

영화 ‘유리정원’을 연출한 신수원 감독이 이같이 말했다. 신 감독의 신작 ‘유리정원’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다.“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제의 개막작이라니…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네요. 영화를 만들고 나서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이라서 기분이 정말 좋아요.”

‘유리정원’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과 슬픈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홀로 숲 속의 유리정원에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를 훔쳐보며 초록의 피가 흐르는 여인에 대한 소설을 쓰는 무명작가의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상에 밝혀지게 되는 충격적인 비밀을 다뤘다. 그간 어떤 작품에서도 보지 못한 신선한 소재다.

“이 시나리오를 꽤 오랫동안 준비했어요. 원래 제목은 ‘어떤 책의 연대기’였죠. 너무 뻔해서 잘 안 풀리더라고요. 영화 ‘마돈나’를 준비하던 중 뇌사상태에 빠진 식물인간 미나가 있는데 그 인물을 통해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뇌가 죽으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은 정말 없어지는 걸까’라고요. ‘왜 식물인간이라고 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죠. 어원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신격화하는 관습이 있는데 거기서 온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신 감독은 나무와 인간을 연관시켰다. 어쩌면 ‘인간이 나무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배우 문근영과 만나 완성됐다. 그는 왜 문근영을 택했을까.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잠깐 보다가 문근영 씨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예전에 봤던 아역느낌이 아니라 원숙해진 느낌이 들더라고요. ‘언젠가 기회 되면 같이 일 해봐야지’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만나게 됐죠. 시나리오를 줬는데 문근영씨가 거부감 없이 흔쾌히 수락했더라고요.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나무에게 노래를 해준 경험이 있어서 시나리오를 공감하고 깊이 이해했죠. 소속사도 ‘나무액터스’인데 연관성이 많지 않나요? 하하.”

신수원 감독/사진제공=리틀빅피처스
문근영은 ‘유리정원’ 속 캐릭터 재연 역을 밀도감 있게 표현했다. 재연은 어릴 적부터 한쪽 발의 기형을 갖고 태어나 다리를 저는 인물이다. 순수와 욕망사이에서 흔들리지만 자신의 신념을 굳게 밀고 나간다. 신 감독은 재연 역을 통해서 생존 이상의 가치를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재연이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바보가 돼버리고 꿈조차 인정 받지 못해 숲으로 숨죠. 하지만 거기서마저도 편히 쉬지 못해요. 저는 재연이 요즘 현대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군가에게 해를 입혀야 생존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동물이 아니에요. 무조건적인 생존만을 위한 삶은 살지 않으니까요.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가치를 지켜나가는 거죠.”

지훈 역 역시 흥미로운 캐릭터다. 재연을 모델로 소설을 쓰며 하루 아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하지만 재연의 사연을 알고 소설의 마침표를 찍기 두려워진다. 신 감독은 지훈을 통해서 많은 예술가와 창작자들의 딜레마를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어떤 작품을 만들 때 실제 다양한 인물과 상황을 만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창작을 시작하잖아요. 그럴 때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훔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간혹 합니다. 작품을 베끼는 것만이 표절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으로 창작을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창작자의 어쩔 수 없는 딜레마죠.”

데뷔작 ‘레인보우’로 제23회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상을 수상한 신 감독은 단편영화 ‘순환선’으로 2012년 제65회 칸영화제 카날플뤼스상을 받았다. ‘명왕성’으로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정곰상 특별언급상, 제11회 피렌체 한국영화제 심사위원상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과 함께 수상의 쾌거를 이뤘다. 이후 영화 ‘마돈나’로 2015년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을 받았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영화였지만 신 감독은 결국 인정받았다.

“영화를 시작했을 때 한 스승님이 말씀하셨죠. ‘너는 충무로에서 데뷔하기 가장 힘든 조건을 갖고 있다’고요. 늦은 나이와 여자라는 게 문제였죠. 예전에 카메라를 든 여성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이 있는데 이창동 감독님이 보시고 ‘여성이 스스로 보호의 대상이 되려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하고 뒤돌아보게 됐죠. 이후에 모든 생각을 던지고 ‘나는 감독이다’라고만 생각했죠. 여자이기 전에 감독이잖아요. 앞으로도 감독으로서 열심히 해 나가야죠.(웃음)”

부산=박슬기 기자 psg@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