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이정열 / 사진제공=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사라진다’는 것은 아쉽고, 또 애틋하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아마도 매회 다른 관객을 맞이하며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이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이 아닐까.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이기도 한 이정열도 그 매력에 이끌려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사라지니까 아쉽고, 그래서 설렌다고 말하는 그는 노래가 좋아 기타를 잡았고, 우연히 시작한 연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예술인으로 산지 어느덧 20년.

마치 자신의 뒤를 돌아보게 한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으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한다. 그룹 동물원과 고(故) 김광석,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로 빚어진 이 작품을 통해 이정열은 또 다른 힘을 얻었다.10. ‘그 여름, 동물원’이 반환점을 돌았다. 많이 익숙해졌을 것 같은데.
이정열 : 맞다. 익어가고 있다.

10. 내년, 뮤지컬 ‘영웅’의 출연도 결정해 연습과 공연을 병행하고 있다.
이정열 : 운 좋게 끝날 때 즈음 섭외가 돼 참여하게 됐는데, 물론 힘들기도 하지만 배우로서 좋은 것 아닌가. 여러 가지 인생을 잠깐이긴 하지만 한 인물을 살아보는 거니까 말이다. ‘그 여름, 동물원’에선 창기라는 현대의 인물로, 또 ‘영웅’을 통해서는 과거의 이토 히로부미란 인물로. 익사이팅하다.(웃음)

10. ‘그 여름, 동물원’에서 맡은 김창기란 인물은 극을 이끄는 스토리 텔러로서의 역할도 해야 한다. 에너지 소모가 더 클 것 같은데.
이정열 : 앞에 서서 관객과 호흡을 해야 하는 캐릭터라 매우 어려운 숙제일 수 있다. 또 실존하는 인물이라 더 그렇고.(웃음)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의 마음이 열리면, 우린 다 같은 편이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한 번 해봐’라는 식이라면 굉장히 어렵다. 쉰, 예순의 관객들도 마음만큼은 스물과 서른이다.10. 중장년층 관객들이 커튼콜 때 일어나서 환호하는 걸 보고 놀랐다.(웃음)
이정열 : 마음을 흔들었다는 반증이다.

10. 소모되지만, 그만큼 에너지를 많이 얻겠다.
이정열 : 그렇다. 사실 지난겨울, 동숭아트센터에서 짧게 공연됐다. 당시 일정이 맞지 않아 마지막 날의 공연을 봤는데 인상이 강렬했다. 예상되는 진행이지만, 공연 이후의 향기랄까, 여파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 뒤풀이 자리에도 참석했는데, 그때 ‘같이 해보자’셔서 ‘좋죠, 감사하죠’라고 했고, 이번에 참여하게 된 거다. 공연을 하다 보면, 맡는 역할과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음색과 태도, 모든 것들이 바뀐다. 캐릭터에 따라서 장면마다 쓸 수 있는 소리들이 제한적인데 ‘그 여름, 동물원’을 통해서는 그간 공부한 여러 가지 다른 색깔의 소리를 쓸 수 있게 돼 재미있다.

10. 뮤지컬 ‘그날들’에 이어 김광석, 그리고 그의 노래를 떠올린다. 애틋한 마음이 생겼을 것 같다.
이정열 : 역시 내게도 그는 워너비였다. 김광석처럼 되고 싶었고, 그래서 말투도 따라 했다. 아쉽고, 안타깝고 지금 곁에 있었으면 크게 기댈 언덕이었을 텐데…근데, 살아있지 아니하여도 이렇게 큰 자리를 만들어주니 그의 그늘 밑에서 후배들이 놀고 있는 게 아닐까. 항상 고맙다.10. 사실 포크그룹 출신으로, 이 공연을 하면서 자신의 옛 생각도 떠오를 것 같다.
이정열 : 동물원이 인기를 얻을 즈음, 나도 데뷔를 했다. 동물원은 뭐랄까, 모범답안 같은 존재였다. 사실 그들의 노래는 순수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결사적이지 않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이거 아니면 안돼!’라는 게 아니라 ‘좋아하고 재미있는 걸 하는 거야’라는 느낌인 거다. 그점이 어떤 삶들을 움직인 게 아닐까. 반면, 당시의 나는 노래할 때 결사적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시기와 질투, 콤플렉스에 점철돼 있었는데 동물원 형들을 따라 하면서 배웠고 그 사이에 진리랄까, 길을 찾고 터득한 것 같다. 약간의 거리 두기, 쉽지 않은 날들이 저에게 주는 가르침은 거리두기였다.

10. 노래는 타고난 재능으로 거리 두기가 가능했다면, 연기를 시작했을 때는 많이 울었다고. 거리 두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정열 : 사실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는데, 나이가 들면 다 한다.(웃음) 세월이 흐르고, 하루하루를 겪으면 말이다. 사람의 24시간처럼 다이내믹한 것이 어디 있나. 어마어마한 일도 일어나고. 무대보다 현실이 더 스펙터클 하기도 하다. 이런 매일이, 모르는 사이에 다 쌓이는 거다. 알파고를 예로 들면, 그건 수만 수천 번의 대국이 입력돼 비슷한 상황에 당도하면 파악을 거쳐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의 상황이 ‘나라면 어땠을까’라고 떠올렸을 때 얼추 과거의 경험과 부합하는 상황이 그려지고, 그러면 연기가 좋아질 수밖에. 예전엔 그러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면, 이젠 자연스럽게 경험이 우러난다. 어느 순간 눈물이 툭하고 나는 것처럼, 사실 경험, 그것 하나의 차이인데 엄청난 발전처럼 보일지도 모르지.(웃음)

이정열 / 사진제공=키컴즈

10. 그렇다면 반대의 상황도 있겠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인데, 떠오르는.

이정열 : 그건 스스로 선택한 형벌과도 같다. 배우라면 말이다. 모든 걸 좋은 것만 얻을 순 없는 것 아닌가. 굉장히 희한하다. 특히 힘든 상황, 가령 친구의 장례식장 같은 어려운 곳에 가 있으면…일종의 직업병인 것 같은데, ‘이 상황이면 이런 느낌이구나’ 하면서 옷의 냄새, 사람들의 표정, 피로도 등을 저장해둔다. 기억하려고 하고. 물론 선배들이 들으면 웃을 테지만, 기억하는 방법이 세련돼졌다고 할까. 한 번만 쓱 보면 알게 되더라.

10.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고집을 부렸는데 내려놓거나, 아니면 새롭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이정열 : 어느 면에서 멋있어 보이려고 애 썼던 걸 내려놨다. 무대 위에서 폼을 잡은 거다. 멋있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에서 해방됐다. 역설적이게 폼을 잡지 않고 있었더니, ‘멋있다’고 해주더라. 연기하지 않는 연기, 보이지 않는 순간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것 같다.

10. 사실 스트레스가 엄청난 일 아닌가. 긴장을 놓을 수가 없고, 관객들에게 매일 최고의 공연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정열 : 무대 위에서는 잊게 된다. 물론 처음, 첫 장면에 들어갈 때는 막 긴장을 한다. ‘발음 틀리면 안 돼, 목 상태가 별로인데 어떡하지’ 하면서 말이다. 5분 정도 지나면 잊는 거다. 오히려 무대 위에서 현실을 떠올리면 ‘아차!’하고 실수를 한다. 배우로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이지 싶다. 가끔, 지금도 후배들에게 쓴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대에서 내려와서도 배우인 척 하지 마라’는 말이다. 요즘은 그런 말도 하지 않게 됐지만.(웃음)10. 분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더 강조하는 것일 테고.
이정열 : 분리는 굉장히 힘든 거다. 무대 옷을 벗으면, 그 사람을 벗는 거니까. 근데 그게 묻어 있으면 인생이 어려워진다.

10. 어느 순간 분리가 되던가.
이정열 : 언제라고 말할 순 없다. 자연스럽게 그 방법이 찾아온 것 같다. 내려놓고, 폼 잡지 않다 보니까. 무대 위에서 뭘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고민해봤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되더라. 전에는 무대 위에서 뭔가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 순간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뭘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뭘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거다. 또 하나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됐다. 아까 말한 것의 연장선인데,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벗으니까 됐다. 분명히 어떤 장면의 포커스는 내가 아닌, 내 앞의 두 배우이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관객의 집중은 두 사람에게 가는 게 맞고, 집중이 될 수 있게 나도 최대한 행동을 자제해야 하는 거다. 기운을 몰아주는 거지. 객관적으로 관객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건데, 어느 순간 온다.

10. 사실 무대 연기는 모니터를 할 수 없지 않나. 그래서 연습 내내 ‘맞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하던데. 이제 그런 의구심은 없겠다.
이정열 : 에이~ 아니다. 여전히 의심하고 질문하고 갈등의 연속이다.(웃음) 정말 다행스러운 건 전 세계적으로 엄두를 못내는 시스템인 더블, 트리플 캐스팅이 우리는 있지 않나.(웃음) 객석에서 연출자의 마음으로 나와 같은 역할을 맡은 배우가 하는 걸 보면, 구성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게 아주 많이 도움이 된다. 물론,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관찰하면서 도움을 받고. 저 자리에서 저 옷과 조명을 왜 사용했는가 하는 부분도 이해가 되면 마음이 놓인다.

10. 연기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 시행착오가 많았겠지.
이정열 : 전공자가 아니라 자연스러웠던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배웠던 방법, 기술이 남아있어서 괴롭혔을 텐데. 심지어 전공자가 아닌 나도 어느 부분에서는 따라하던 톤과 어느 배우의 눈빛이 남아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좀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이정열/ 사진제공=키컴즈


10. 이제 선배가 됐다. 질문에 답을 하는 일도 많을 텐데.

이정열 : 전과 달리 확실히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졌다. 선배들이 하는 ‘후배가 가장 무섭다’라는 말을 이젠 알겠다.(웃음) ‘그 여름, 동물원’을 연습할 때 집인 분당에서 연습실이 있는 대학로까지 다녔다. 연습이 오전 10시부터였는데, 오전 7시 30분까지는 나와야 도착 가능하다. 늦지 않으려고 애썼다. 괜히 후배들에게 모범이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팀의 화합을 위해서도 신경을 쓰게 되고.(웃음)

10. 사실 딸도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딸이 후배이기도 하다.
이정열 : 딸에겐 내가 아빠이자 선배, 또 선생이기도 하니까 불편하기도 할 거다. 집에서 연기적인 이야기, 음악을 소화하는 방법들에 대해 말할 때 조심스럽다. 마치 부부간에 운전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웃음) 잘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칭찬을 해준다. 내가 현업에 있으니까 앞으로도 같은 무대에서 볼 때가 있을 텐데, 아마 당분간은 ‘누구의 딸이라더라’는 말을 듣고, 핸디캡이 될 거다. 어릴 때 내 덕분에 공연을 많이 봤으니, 그 정도는 후불카드쯤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겠나. 연기를 택했으니, 남은 인생을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러길 바란다.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아빠로서는 뿌듯하다. 내 딸이지만 신기하게 잘한다. 그런데 공연장에서 선배, 동료, 배우의 입장에서는 데면데면하다.(웃음)

10. ‘그 여름, 동물원’을 마치고 나면 어떻게 기억될 것 같은가.
이정열 : 많은 분들이 격려를 해줘서 긍정적인 기운으로 남을 것 같다. 또 이 작품은 겨울의 레퍼토리로 계속 이어질 것 같고. 끝나고도 생각이 날 텐데, 다음에도 꼭 참여하고 싶다.

10. 무대 연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매력은 뭘까.
이정열 : 무대 극의 장점이자 단점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나 그림처럼 그 형태가 사진처럼 남아 있다면 꺼내볼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사라진다는 무한 매력이 무대극에는 있다. 잘 사라지는 것이 잘 살 수 있는 길이다.(웃음)

10. 또 다른,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나.
이정열 :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가수 이정열로 산다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는데, 이제는 복잡하고 무거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 돼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흔들리는 마음이 좀 덜해졌다고 해야 할까. 하고 싶은 건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음반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발매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준비하고 있다.(웃음)

10. 다가오는 2017년, 또 많은 일들이 있겠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
이정열 : 내년이 매우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이유 중 하나는 몸이 아팠는데, 내년이면 의사들이 완치라고 하는 5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제 쉰에 가까워지는 시간인데 비로소 인생 2막이지 않을까. 거창하게, 또 어마어마한 사건을 바라는 건 아니고, 주위를 보듬고 후배를 챙기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좋은 공연을 만났으면 좋겠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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