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대한민국 대표미남을 꼽는 대회가 있다면 결승전까지 무난하게 진출할 사람은 단연 정우성일 게다. 남녀 모두의 호감을 사는 그의 얼굴은 조물주가 ‘스페셜 에디션’으로 빚어낸 욕망의 그림 같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은 배우 정우성이 넘어서야 지점이기도 했다. 한때 정우성은 상업영화 안에서 본인의 잘생긴 얼굴을 일부러 구기는 방법으로 대중의 선입견을 허물고자 했다. 미끈한 슈트보다 촌스러운 꽃무늬 난방을 끌어안았고, 부잣집 아들보다 밑바닥 아웃사이더를 연기했다. ‘똥개’는 미모가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아는 자의 선택이었다.
반면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는 대중이 원하는 정우성의 달달한 모습을 정확히 꺼낸 멜로 영화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대중의 욕망보다 정우성의 간절함이 보다 강하게 투영된 영화일지 모른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정우성이 세운 영화사 ‘더블유 팩토리’의 첫 작품. 후배 이윤정 감독이 쓴 시나리오의 독특한 무드에 매료된 정우성은 해당 작품이 마땅한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자, 아예 제작사를 차려 후배에게 기회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작자 정우성을 출발선에서 만났다.
10. ‘나를 잊지 말아요’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스크립터였던 이윤정 감독이 2010년에 발표한 동명의 단편에서 출발한 영화입니다. 감독이 당신을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남자주인공 이름이 W였다고요.(웃음) 자신의 팬이었던 감독과 함께 하는 작업은 좀 남다른 면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정우성: 감독이 “컷”을 안 하고 “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일동웃음) 하지만 현장에서는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되잖아요. 신인감독을 대하는 선배처럼 임했어요. 엄격한 제작자였죠. 아마 이윤정 감독에겐 현장이 많이 고됐을 거예요. 힘든 시간을 잘 이겨냈다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멜로깡패’라는 수식어가 제게 있는 줄 몰랐어요”
10. 제작자로서도 참여한 작품입니다. 과거 단편영화 ‘킬러 앞에 노인’, ‘세 가지 색-삼생’을 통해서는 연출을 경험하셨죠. 연출자-배우-제작자, 각각의 입장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다르게 느껴지나요.
정우성: 다르죠. 각자의 임무가 정확하게 다르니까요. 배우는 감정의 표출을 통해 캐릭터의 인격을 만들어갑니다. 감독은 전체적인 세계관을 확립해서 배우와 관객들이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죠. 배우와 감독은 감성적인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하는 게 있어요. 반면 감성의 작업자들을 이성적으로 제어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제작자죠.
10. 그렇다면 연출을 하면서 연기하는 것과, 제작을 하면서 연기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겠네요. 배우-감독 역할은 감성적인 측면에서 상승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배우-제작자 역할은 그 안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정우성: 부딪힐 수 있죠. 감정의 출동이 일어날 수 있어요. 배우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제작자의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제작자 중에 현장에 상주하거나 자주 오는 분은 드물어요. 개인적으로, 제작자는 현장에 많이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바로 잡아주고 서포트 하는 것이 제작자의 역할이니까요. 저는 배우이기도 하다 보니 현장에 쭉 상주했는데, 이전에 현장에서 느꼈던 돌출되는 문제점들을 더 확실하게 파악하는 기회였어요.10. 배우 입장에서 제작자가 현장에 자주 오는 게 연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나요?
정우성: 아니요. 걸림돌이 되는 제작자는 제작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10. 명쾌하군요. ‘나를 잊지 말아요’는 대중이 원하는 정우성의 모습을 정확히 꺼낸 작업이란 생각이 들어요. 정우성표 멜로를 기다려 온 관객들이 많았거든요.
정우성: 사실 정우성표 멜로가 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멜로깡패’라는 수식어가 저에게 있는지도 이번에 인터뷰 하면서 알게 됐어요. ‘대중이 나의 이런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깨닫는 중입니다.
10. 아, 몰랐나요? 늦은 감이 있네요.(웃음)
정우성: 그러게 말이에요.(웃음) 대중이 배우 정우성에게 바라는 이미지에 연연해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그걸 지키는 매니징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영화에 관객들이 보여주는 관심을 보면서 ‘팬들이 원하는 것들을 지켜줘야 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10. 그런데 ‘감시자들’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할 당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요? “이제는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겠다”고.
정우성: 그러니까, 그땐 대중이 남자배우에게 원하는 것이 액션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감시자들’을 한 거고 ‘신의 한 수’를 선택했던 거죠. ‘나를 잊지 말아요’는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목적성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기획한 작품이에요. 그런데 마침 관객의 기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게 된 경우죠. 참 다행스러워요.
10. 사랑은 모두가 다 아는 감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 않나 싶어요. 속일 수가 없잖아요.
정우성: 사랑이라는 감정이 되게 묘한 게,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가끔 ‘아, 사랑하고 싶어!’ 라는 말을 하잖아요. 단어가 주는 묘한 판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도 사람이기에 그런 감정의 판타지가 있어요. 그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 “잊고 싶은 기억이요? 단 하나도 없습니다”10. 기억을 잃은 인물을 연기하면서 혼란스러운 건 없었나요.
정우성: 석원(정우성)은 오히려 속 편했어요. 석원은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인물이에요. 자신의 기억이 되살아 날까봐 두려워하는 인물이죠. 그런 석원을 바라보는 진영(김하늘)이야말로 힘들었을 거예요. 복잡한 감정을 김하늘 씨가 너무 잘 해 줬어요.
10.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쁜 기억을 잊고 싶어 합니다.
정우성: 강한 자기방어기제가 있죠.
10. 인간 정우성에게도 개인적으로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 테죠?
정우성: (거두절미하게)없습니다.10. 상당히 확고하시네요.
정우성: 다, 소중하니까요.
10. 쓰린 기억도요?
정우성: 네. 어릴 때 불우했어요. 돈이 없었죠. 버스 정류장에서 ‘뭘 먹을까. 어디로 가야하지?’ 하고 있는데, 가을바람에 길거리의 냄새들이 코끝에 와 닿는 거예요. 그때의 그 향이 소중하게 각인돼 있어요. 사랑과 관련된 기억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편집해서 좋은 기억만 간직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죠. 자기방어를 하는 건데, 아픈 사랑도 사랑이잖아요? 그 순간엔 얼마나 진실하고 절실했겠어요. 상대가 나를 몰라줘서 아팠을 수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판타지와 다른 현실적 사랑에 괴로웠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진실이었던 거잖아요. 그런 기억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것이 한 사람 인생의 완성이라고 봐요.
10. 버스정류장에서 맡았다는, 길거리 향이… 감수성 예민한 청년을 상상하게 됩니다.
정우성: 많은 것들을 느끼려고 했던 시절이에요. 제가 일찍 세상으로 뛰어나왔거든요. 어린나이에 세상을 관찰하고, 나라는 존재를 확립해야 했기에 모든 것들이 민감하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10. 기억엔 여러 감각들이 동원되잖아요. 후각 촉각 시각… 어떤 감각에 강하세요?
정우성: 음… 감정적인 기억이요. 당시의 교감이나. 시각적, 후각적 기억력이 꽤 좋기는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길거리에 냄새가 없어진 것 같아요. 물론 제게 길거리를 다닐 기회가 많이 사라지다보니, 스스로 상실한 것도 있을 거예요. 직업적 특성에 의해 상실한 게 꽤 있어요.
10. 쓰린 기억도 소중하다고 하셨는데, 불우했던 시절은 당신에게 어떻게 남아있나요.
정우성: 그런데 그게 불우했던 기억이지 불행했던 기억은 아니에요. 성장과정이 불우하다고 해서 불행한 건 아니니까요. 가정 형편이 좋은데도 불행한 사람은 많잖아요. 그리고 뭐랄까. 그때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게 그 시절의 나를 움직이는 힘이었죠.
10. 막연하게 동경했던 세상을 겪어보니 어떤가요?
정우성: 배우라는 직업이 현실과 단절된 면이 있어요. 말씀드렸듯 길거리의 냄새를 맡을 기회도 많이 상실했어요. 배우로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경험을 축적하면서 이쪽 업계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은 성장했다고 봐요.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세상은 제게 신기해요.
10. 어쩌면 세상과의 간격이 더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정우성: 네. 왜냐하면 ‘비트’가 끝나고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을 얻었어요. 그런데 정작 저에게는 청춘이라는 시절이 없었거든요. 일반화돼 있는 청춘의 시절을 겪지 못했죠. 학창시절도 없었고, 대학 다니면서 이성교제를 해본 것도 아니었어요.
10. 그런 삶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시나요.
정우성: 안쓰럽죠. 일상엔 굉장히 풍성한 감정들이 존재하잖아요. 많은 인간관계가 존재하고요. 그런 것들로부터 고립된 셈이니, 어떤 부분에서는 안쓰럽죠.
10. 외로울 때, 어떻게 해요?
정우성: 음… 술?(웃음)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몰래 섞여서 함께 하는 거죠. 저는 아직도 영화를 볼 때 철저하게 관객이 돼요. 내 영화일 때는 물론 아니지만, 다른 배우들의 영화를 볼 때는 관객이 돼서 빠져요. 그러면서 또 연기에 대한 꿈을 꾸고요.
# “제가 꿈만 가지고 덤빈 사람이잖아요. 무일푼에서”
10. 후배 이윤정 감독이 쓴 시나리오가 투자자를 찾지 못하자,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우성: 그 후배가 이윤정이기 때문에 한 건 아니에요. 후배들이 선배에게 느끼는 막연함 혹은 자신 없음. 그런 것들을 봤을 때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마침 이윤정이라는 후배가 ‘나를 잊지 말아요’ 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렇게 작품이 나온 것이지, 제가 각별하게 한 사람에 대한 의리와 우정으로 한 건 아닙니다. 업계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기회를 나눠줘야지 하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만남인 거예요.
10.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실천까지 이어진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요.
정우성: 20대는 어떤 체계나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나이고, 30대는 어느 정도 방관을 해도 되는 나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40대는 선배잖아요. 선배는 불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이미 그 시간을 경험했으니 불만이 있으면 바꾸려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덧 내가 어른의 나이가 됐네. 어릴 때의 나는 사회에 많은 불만을 지껄였는데, 지금 내 나이 때에는 뭘 해야 하는 거지?’ 결국 실천이더라고요. 선배 입장에서 잘못된 것들을 바꿔가는 행동을 해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어요.
10. 사실 흥미롭긴 해요. 데뷔 때부터 당신은 많은 감독과 제작자들이 함께 하고 싶은 배우였어요. 뭔가에 가로막혀서 크게 좌절했던 배우는 아니죠. 만약 힘든 20-30대를 겪은 배우가 후배들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면 ‘본인이 힘들었으니 돕는구나’ 할 텐데, 쭉 톱 자리를 달려 온 배우가 이러니까 좀 흥미로운 거죠.
정우성: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흥미롭네요.(일동웃음) 제가 꿈만 가지고 덤빈 사람이잖아요. 아무것도 없이. 무일푼에서. 그 꿈을 가지고 이룬 게 많으니까, 이젠 나눌 때가 된 거죠. 사람 인생에서 꿈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꿈을 일찍 포기하는 후배들을 봤을 때 안쓰러운 거예요. 그런 후배들을 누가 끌어주겠어요. 선배가 끌어줘야죠. 그게 세대 간의 소통이잖아요. 그게 안 되면 단절인 거예요.
10. 그런 선배가 당신에게도 있었나요? 아니면 없었기에 아쉬워서 더 신경을 쓰는 건가요.
정우성: 없어서 아쉬웠나 봐요.(웃음) 사실 한국 영화계가 그렇게 여유가 있지 않아요. 지금 ‘관객 2억명 시대’라고 하지만 천만을 터뜨린 제작자가 얼마나 되겠어요. 천만 영화를 얻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생들을 했을 테고요. 천만이 터져서 큰 수익을 얻었지만 너무 급작스러울 테고, 그걸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을 겁니다. 그런 여유를 갖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측면에서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게 낫지 않나하는 생각이 있어요.
10.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공을 해 본 자가 가질 수 있는 생각들 같군요.
정우성: 사실 제가 더 큰 성공을 꿈꾸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해요. 영화판이 튼튼해야 배우로서의 나의 본분도 안정적일 테니까요.
10. 이야기를 듣다보니, ‘옳은 어른’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해 오지 않았나 싶군요.
정우성: 맞아요. 나이를 잘 먹는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해요. 외모가 예쁜 게 전부는 아니죠.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정우성: 사랑의 정의요? 사랑은 판타지. 찬란한 판타지들이 우리 삶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감지를 못해요. 남의 사랑 이야기에는 “오, 진짜야? 그렇게 만났어?” 놀라면서 자신의 사랑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일어지고 있는 사랑의 판타지들을 눈치 채고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대한민국 대표미남을 꼽는 대회가 있다면 결승전까지 무난하게 진출할 사람은 단연 정우성일 게다. 남녀 모두의 호감을 사는 그의 얼굴은 조물주가 ‘스페셜 에디션’으로 빚어낸 욕망의 그림 같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은 배우 정우성이 넘어서야 지점이기도 했다. 한때 정우성은 상업영화 안에서 본인의 잘생긴 얼굴을 일부러 구기는 방법으로 대중의 선입견을 허물고자 했다. 미끈한 슈트보다 촌스러운 꽃무늬 난방을 끌어안았고, 부잣집 아들보다 밑바닥 아웃사이더를 연기했다. ‘똥개’는 미모가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아는 자의 선택이었다.
반면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는 대중이 원하는 정우성의 달달한 모습을 정확히 꺼낸 멜로 영화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대중의 욕망보다 정우성의 간절함이 보다 강하게 투영된 영화일지 모른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정우성이 세운 영화사 ‘더블유 팩토리’의 첫 작품. 후배 이윤정 감독이 쓴 시나리오의 독특한 무드에 매료된 정우성은 해당 작품이 마땅한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자, 아예 제작사를 차려 후배에게 기회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작자 정우성을 출발선에서 만났다.
10. ‘나를 잊지 말아요’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스크립터였던 이윤정 감독이 2010년에 발표한 동명의 단편에서 출발한 영화입니다. 감독이 당신을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남자주인공 이름이 W였다고요.(웃음) 자신의 팬이었던 감독과 함께 하는 작업은 좀 남다른 면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정우성: 감독이 “컷”을 안 하고 “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일동웃음) 하지만 현장에서는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되잖아요. 신인감독을 대하는 선배처럼 임했어요. 엄격한 제작자였죠. 아마 이윤정 감독에겐 현장이 많이 고됐을 거예요. 힘든 시간을 잘 이겨냈다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멜로깡패’라는 수식어가 제게 있는 줄 몰랐어요”
10. 제작자로서도 참여한 작품입니다. 과거 단편영화 ‘킬러 앞에 노인’, ‘세 가지 색-삼생’을 통해서는 연출을 경험하셨죠. 연출자-배우-제작자, 각각의 입장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다르게 느껴지나요.
정우성: 다르죠. 각자의 임무가 정확하게 다르니까요. 배우는 감정의 표출을 통해 캐릭터의 인격을 만들어갑니다. 감독은 전체적인 세계관을 확립해서 배우와 관객들이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죠. 배우와 감독은 감성적인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하는 게 있어요. 반면 감성의 작업자들을 이성적으로 제어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제작자죠.
10. 그렇다면 연출을 하면서 연기하는 것과, 제작을 하면서 연기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겠네요. 배우-감독 역할은 감성적인 측면에서 상승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배우-제작자 역할은 그 안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정우성: 부딪힐 수 있죠. 감정의 출동이 일어날 수 있어요. 배우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제작자의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제작자 중에 현장에 상주하거나 자주 오는 분은 드물어요. 개인적으로, 제작자는 현장에 많이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바로 잡아주고 서포트 하는 것이 제작자의 역할이니까요. 저는 배우이기도 하다 보니 현장에 쭉 상주했는데, 이전에 현장에서 느꼈던 돌출되는 문제점들을 더 확실하게 파악하는 기회였어요.10. 배우 입장에서 제작자가 현장에 자주 오는 게 연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나요?
정우성: 아니요. 걸림돌이 되는 제작자는 제작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10. 명쾌하군요. ‘나를 잊지 말아요’는 대중이 원하는 정우성의 모습을 정확히 꺼낸 작업이란 생각이 들어요. 정우성표 멜로를 기다려 온 관객들이 많았거든요.
정우성: 사실 정우성표 멜로가 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멜로깡패’라는 수식어가 저에게 있는지도 이번에 인터뷰 하면서 알게 됐어요. ‘대중이 나의 이런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깨닫는 중입니다.
10. 아, 몰랐나요? 늦은 감이 있네요.(웃음)
정우성: 그러게 말이에요.(웃음) 대중이 배우 정우성에게 바라는 이미지에 연연해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그걸 지키는 매니징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영화에 관객들이 보여주는 관심을 보면서 ‘팬들이 원하는 것들을 지켜줘야 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10. 그런데 ‘감시자들’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할 당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요? “이제는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겠다”고.
정우성: 그러니까, 그땐 대중이 남자배우에게 원하는 것이 액션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감시자들’을 한 거고 ‘신의 한 수’를 선택했던 거죠. ‘나를 잊지 말아요’는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목적성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기획한 작품이에요. 그런데 마침 관객의 기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게 된 경우죠. 참 다행스러워요.
10. 사랑은 모두가 다 아는 감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 않나 싶어요. 속일 수가 없잖아요.
정우성: 사랑이라는 감정이 되게 묘한 게,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가끔 ‘아, 사랑하고 싶어!’ 라는 말을 하잖아요. 단어가 주는 묘한 판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도 사람이기에 그런 감정의 판타지가 있어요. 그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 “잊고 싶은 기억이요? 단 하나도 없습니다”10. 기억을 잃은 인물을 연기하면서 혼란스러운 건 없었나요.
정우성: 석원(정우성)은 오히려 속 편했어요. 석원은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인물이에요. 자신의 기억이 되살아 날까봐 두려워하는 인물이죠. 그런 석원을 바라보는 진영(김하늘)이야말로 힘들었을 거예요. 복잡한 감정을 김하늘 씨가 너무 잘 해 줬어요.
10.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쁜 기억을 잊고 싶어 합니다.
정우성: 강한 자기방어기제가 있죠.
10. 인간 정우성에게도 개인적으로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 테죠?
정우성: (거두절미하게)없습니다.10. 상당히 확고하시네요.
정우성: 다, 소중하니까요.
10. 쓰린 기억도요?
정우성: 네. 어릴 때 불우했어요. 돈이 없었죠. 버스 정류장에서 ‘뭘 먹을까. 어디로 가야하지?’ 하고 있는데, 가을바람에 길거리의 냄새들이 코끝에 와 닿는 거예요. 그때의 그 향이 소중하게 각인돼 있어요. 사랑과 관련된 기억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편집해서 좋은 기억만 간직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죠. 자기방어를 하는 건데, 아픈 사랑도 사랑이잖아요? 그 순간엔 얼마나 진실하고 절실했겠어요. 상대가 나를 몰라줘서 아팠을 수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판타지와 다른 현실적 사랑에 괴로웠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진실이었던 거잖아요. 그런 기억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것이 한 사람 인생의 완성이라고 봐요.
10. 버스정류장에서 맡았다는, 길거리 향이… 감수성 예민한 청년을 상상하게 됩니다.
정우성: 많은 것들을 느끼려고 했던 시절이에요. 제가 일찍 세상으로 뛰어나왔거든요. 어린나이에 세상을 관찰하고, 나라는 존재를 확립해야 했기에 모든 것들이 민감하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10. 기억엔 여러 감각들이 동원되잖아요. 후각 촉각 시각… 어떤 감각에 강하세요?
정우성: 음… 감정적인 기억이요. 당시의 교감이나. 시각적, 후각적 기억력이 꽤 좋기는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길거리에 냄새가 없어진 것 같아요. 물론 제게 길거리를 다닐 기회가 많이 사라지다보니, 스스로 상실한 것도 있을 거예요. 직업적 특성에 의해 상실한 게 꽤 있어요.
10. 쓰린 기억도 소중하다고 하셨는데, 불우했던 시절은 당신에게 어떻게 남아있나요.
정우성: 그런데 그게 불우했던 기억이지 불행했던 기억은 아니에요. 성장과정이 불우하다고 해서 불행한 건 아니니까요. 가정 형편이 좋은데도 불행한 사람은 많잖아요. 그리고 뭐랄까. 그때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게 그 시절의 나를 움직이는 힘이었죠.
10. 막연하게 동경했던 세상을 겪어보니 어떤가요?
정우성: 배우라는 직업이 현실과 단절된 면이 있어요. 말씀드렸듯 길거리의 냄새를 맡을 기회도 많이 상실했어요. 배우로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경험을 축적하면서 이쪽 업계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은 성장했다고 봐요.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세상은 제게 신기해요.
10. 어쩌면 세상과의 간격이 더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정우성: 네. 왜냐하면 ‘비트’가 끝나고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을 얻었어요. 그런데 정작 저에게는 청춘이라는 시절이 없었거든요. 일반화돼 있는 청춘의 시절을 겪지 못했죠. 학창시절도 없었고, 대학 다니면서 이성교제를 해본 것도 아니었어요.
10. 그런 삶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시나요.
정우성: 안쓰럽죠. 일상엔 굉장히 풍성한 감정들이 존재하잖아요. 많은 인간관계가 존재하고요. 그런 것들로부터 고립된 셈이니, 어떤 부분에서는 안쓰럽죠.
10. 외로울 때, 어떻게 해요?
정우성: 음… 술?(웃음)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몰래 섞여서 함께 하는 거죠. 저는 아직도 영화를 볼 때 철저하게 관객이 돼요. 내 영화일 때는 물론 아니지만, 다른 배우들의 영화를 볼 때는 관객이 돼서 빠져요. 그러면서 또 연기에 대한 꿈을 꾸고요.
# “제가 꿈만 가지고 덤빈 사람이잖아요. 무일푼에서”
10. 후배 이윤정 감독이 쓴 시나리오가 투자자를 찾지 못하자,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우성: 그 후배가 이윤정이기 때문에 한 건 아니에요. 후배들이 선배에게 느끼는 막연함 혹은 자신 없음. 그런 것들을 봤을 때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마침 이윤정이라는 후배가 ‘나를 잊지 말아요’ 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렇게 작품이 나온 것이지, 제가 각별하게 한 사람에 대한 의리와 우정으로 한 건 아닙니다. 업계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기회를 나눠줘야지 하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만남인 거예요.
10.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실천까지 이어진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요.
정우성: 20대는 어떤 체계나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나이고, 30대는 어느 정도 방관을 해도 되는 나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40대는 선배잖아요. 선배는 불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이미 그 시간을 경험했으니 불만이 있으면 바꾸려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덧 내가 어른의 나이가 됐네. 어릴 때의 나는 사회에 많은 불만을 지껄였는데, 지금 내 나이 때에는 뭘 해야 하는 거지?’ 결국 실천이더라고요. 선배 입장에서 잘못된 것들을 바꿔가는 행동을 해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어요.
10. 사실 흥미롭긴 해요. 데뷔 때부터 당신은 많은 감독과 제작자들이 함께 하고 싶은 배우였어요. 뭔가에 가로막혀서 크게 좌절했던 배우는 아니죠. 만약 힘든 20-30대를 겪은 배우가 후배들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면 ‘본인이 힘들었으니 돕는구나’ 할 텐데, 쭉 톱 자리를 달려 온 배우가 이러니까 좀 흥미로운 거죠.
정우성: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흥미롭네요.(일동웃음) 제가 꿈만 가지고 덤빈 사람이잖아요. 아무것도 없이. 무일푼에서. 그 꿈을 가지고 이룬 게 많으니까, 이젠 나눌 때가 된 거죠. 사람 인생에서 꿈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꿈을 일찍 포기하는 후배들을 봤을 때 안쓰러운 거예요. 그런 후배들을 누가 끌어주겠어요. 선배가 끌어줘야죠. 그게 세대 간의 소통이잖아요. 그게 안 되면 단절인 거예요.
10. 그런 선배가 당신에게도 있었나요? 아니면 없었기에 아쉬워서 더 신경을 쓰는 건가요.
정우성: 없어서 아쉬웠나 봐요.(웃음) 사실 한국 영화계가 그렇게 여유가 있지 않아요. 지금 ‘관객 2억명 시대’라고 하지만 천만을 터뜨린 제작자가 얼마나 되겠어요. 천만 영화를 얻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생들을 했을 테고요. 천만이 터져서 큰 수익을 얻었지만 너무 급작스러울 테고, 그걸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을 겁니다. 그런 여유를 갖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측면에서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게 낫지 않나하는 생각이 있어요.
10.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공을 해 본 자가 가질 수 있는 생각들 같군요.
정우성: 사실 제가 더 큰 성공을 꿈꾸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해요. 영화판이 튼튼해야 배우로서의 나의 본분도 안정적일 테니까요.
10. 이야기를 듣다보니, ‘옳은 어른’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해 오지 않았나 싶군요.
정우성: 맞아요. 나이를 잘 먹는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해요. 외모가 예쁜 게 전부는 아니죠.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정우성: 사랑의 정의요? 사랑은 판타지. 찬란한 판타지들이 우리 삶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감지를 못해요. 남의 사랑 이야기에는 “오, 진짜야? 그렇게 만났어?” 놀라면서 자신의 사랑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일어지고 있는 사랑의 판타지들을 눈치 채고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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