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상회’ 윤여정.

[텐아시아=황성운 기자] 제 이름은 금님이예요, 임금님. 참 곱디고운 꽃집 여인이다. 소녀 같은 순수함과 수줍음 그리고 다정다감한 미소는 까칠하고 무뚝뚝한 성칠(박근형)마저 무장해제 시킨다. 때론 ‘밥 사세요. 꼭이요’라고 과감하게 먼저 들이댈 줄도 안다. 영화 ‘장수상회’ 속 금님은 윤여정과 다른 듯 닮았다.

윤여정은 분명 독보적인 존재다. ‘바람난 가족’ ‘하녀’ ‘돈의 맛’ ‘고령화가족’ ‘자유의 언덕’ 등 스크린에서 보여준 그간의 행보는 1947년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다. 나이와 무관하게 자신만의 확실한 캐릭터와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런 점에서 ‘장수상회’ 금님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 보인다.하지만 ‘참 좋은 시절’ ‘꽃보다 누나’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 브라운관 속 윤여정은 스크린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다. 우리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엄마이자 할머니다. 그렇게 친근한 모습이다. 이 모습을 생각하면 금님과 윤여정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작은 체구의 가녀린 외형도 영화 속 금님과 꼭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정작 윤여정은 “외향적으로 바꿔준 게 꽃무늬 옷인데, 분홍색 옷을 처음 입어본 것 같다”고 의외의 말을 남겼다. 그리고 “멜로에 별 감흥이 없다”는 말도. 윤여정을 만나 금님과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았다.

Q. 노년층의 이야기지만, 누군가의 연인이다. 여배우들은 다 멜로를 꿈꾼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장수상회’는 하고 싶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윤여정 : 이제 순서대로 일하는 나이가 됐다. ‘장수상회’는 시나리오가 왔는데 이미 드라마 약속이 돼 있어서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진행됐겠지 했는데 다시 연락 와서 내 것인가 보다 했다. 이제는 ‘이 역할 내가 해야지’ 이런 욕심은 없다. 욕심내서 될 것도 없다. 그걸 알 수 있는 나이가 돼서 편안하고 좋다.Q. 한 번 거절했던 것을 다시 한 이유가 있을 텐데.
윤여정 : 방금 말했지만, 언젠가부터 일을 순서대로 한다. 이젠 힘들어서 두 가지는 못 한다. ‘장수상회’는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다른 사람 섭외해도 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할 듯 말 듯한 걸 제일 싫어한다. 빨리 알려줘야지. 그래서 잊고 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그러면 기다려줄 수 있느냐고, 지금 하는 작품 마치고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Q. 그렇다면 강제규 감독이 금님 역으로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궁금하진 않았나. 거절했는데 또 다시 제안했다는 것은 ‘꼭 윤여정이어야만 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아닌가.
윤여정 :
느닷없는 게 왔을 때 물어보곤 한다. 그리고 때론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도 한다. 이번엔 물어보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 역시 로맨틱한 부분보다는 그게 하나의 미션이라면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Q. 그럼 ‘장수상회’를 어떻게 해석했나.
윤여정 : 처음 시나리오를 보면서는 이 할머니가 꽃뱀이야 뭐야 했다. ‘내가 이 여자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가 첫 번째인데 처음에는 왜 자꾸 들이대나 싶었다. 그러다 뒤에 가선 ‘아~’ 했다. 그게 작전이라면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나도 몰입할 수 있고. 그래서 성칠과 금님의 관계를 알고 (연기)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때문에 감독과 한 번 이야기한 적 있다. 성칠을 바라보는 눈이 처음 만난 동네 할아버지 꼬드기는 건 아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대시하는 거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할아버지를 꼬드기는 것처럼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두 가지를 찍자고 했다. 모르는 것과 아는 것으로.
‘장수상회’ 윤여정.

Q. ‘황혼 로맨스’ ‘가족영화’ 등으로 영화가 홍보되고 있는데, 딱히 마음에 들진 않겠다.
윤여정 : 황혼 로맨스로 하는 게 불만이었다. 꽃뱀 할머니도 아니고. 글쎄 모르겠다. 나는 연기만 아는 사람이고, 홍보는 그들의 전략이 있으니까 토를 달 입장은 아니다. 그냥 반신반의하는 건, 박근형과 윤여정의 황혼 로맨스를 누가 보러 올까 싶다. 그것 말고 다른 뭐가 있다는 걸 조금 흘려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반신반의다. 이 세상이 ‘OX’가 아니듯. 하하.

Q. 멜로를 마친 소감도 특별하진 않겠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초중반까지는 성칠과 금님의 로맨스 아닌가.
윤여정 : 젊었을 때도 멜로하기 전에 배우를 그만둔 것 같다. 또 멜로에 그렇게 연연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주변에서 ‘하도 멜로멜로’ 그러니까 지겹다고까지 했다. 오히려 최근에 ‘미생’을 울면서 봤다. 그래서 작가한테 ‘멜로 좀 그만 써라. 오차장과 장그래의 끔찍한 사랑을 보면서 이렇게 우는 데 남녀 사랑이 그게 사랑이냐’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멜로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다.Q. 그럼 이 작품에 임할 때 가장 중점을 뒀던 건 무엇인가. 멜로나 로맨스는 당연히 아닐 테고.
윤여정 : 16~17살 철없을 때 만나서 한 인생을 보낸 사람과 마지막을 보내는 것, 그에 중점을 뒀다. 특별히 멜로라고 생각 안 했다. 만약에 정말 황혼 로맨스였으면 안 했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멜로, 로맨스 감정이) 생길 수가 없다. 내가 피곤하기도 하고, 설렐 수도 없다. 어렸을 때 남녀구분 없듯, 늙어서도 그렇다. 내가 누굴 보고 설레면 큰일이다.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 하하.

Q. 상대 배우가 박근형이어서 편한 것도 있겠다.
윤여정 : 척하면 척이어서. 서로 건드리진 않고, 굉장히 프로답게 잘했다.

Q. 인터뷰마다 과거 ‘장희빈’ 할 때 박근형한테 지적당했다고 말하고 다녀서.
윤여정 :
지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박근형 선배는 무대에서 정말 연기 잘하는, 날리던 배우였다. 난 신인 때였고. 그러니 지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근데 지적당하는 나는 촬영만 들어가면 NG를 내니까. 그런데 슬프고 재밌는 건 이제는 같이 늙어간다는 거다. 많은 세월을 겪은 관계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편안하게 만났고, 그게 전해질 거다. 박근형 선배도 나를 편안하게 봤을 거다. 선수끼리 한 번 하자,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장수상회’ 윤여정.

Q. 그리고 전작들보다는 평범하다 싶을 정도로 고운 역할이다.
윤여정 : 강제규 감독이 많이 도와줬다. 외향적으로 바꿔준 게 꽃무늬 옷이다. 분홍색 옷을 처음 입어본 것 같다. 그리고 사람마다 여러 모양이 있듯, 나 역시 내 속에 많은 내가 있다.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

Q. 영화에서 ‘내가 죽으면 여기 이 돈으로 장례를 치러 달라’는 내용이 담긴 성칠의 메모를 보면서 금님이 우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굉장히 짠했는데, 어떤 느낌이 들었나.
윤여정 : 연기 외적으로는 생각 안 하는 것 같다. 죽는다는 게, 모두 다 죽는다. 매일 매일 죽어가는 거고, 얼마나 많은 동료가 가는 걸 봤겠나. 많이 훈련한다.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아파서 죽는 건 겁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아닌 상태로 죽는다는 건 끔찍하다. 내 이름은 누구고, 어떻게 해달라고 쓰여 있는 메모를 발견했을 때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를 생각했지 나하고 대입은 안 한다.

Q. 촬영하면서 ‘저렇게 살다 죽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윤여정 : 마지막 장면인데 박근형 선배한테 이렇게 살다 같이 죽으면 잘 사는 거고, 좋겠다고 했던 것 같다. 17살에 만나서 평생 아름답게 살다가 가면 좋지 않을까. 엔딩 촬영하면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Q. 화려한 여배우에게 있어 지극히 평범한 마지막 아닌가.
윤여정 : 여배우이기 전에 사람이다. 여배우는 직업일 뿐이다. 그 괴리 때문에 쓸데없이 돌팔매를 맞곤 하지만. 나는 그냥 노배우일 뿐이고, 그렇게 살다 죽으면 아름다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다.

Q. 과거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연기할 수 있는 윤여정만의 힘은 무엇인가.
윤여정 : 힘까지는 모르겠고, 팔자인가 보다. 연기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미남미녀가 아니면 배우를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더빙은 성우가 했고, 연기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했고. 무조건 예뻐야 했는데, 그 시대 배우를 했다는 건 어떤 의미로 기적이었다. 김기영 감독님이 한 말 중에 “미스 윤은 모든 사람한테 배우가 될 용기를 줬어”라고 했다. 비아냥을 잘하시는 분인데, 이는 내가 미녀가 아니라는 얘기였을 거다. 또 어떤 의미로 결혼 생활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를 계속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행복이 불행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아마 열등의식도 있었을 거다. 다른 사람은 예쁜데 나는 아니고, 목소리도 안 예쁘고. 넘어야 할 산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렇게 넘다가넘다가 살아남았나 보다.


‘장수상회’ 윤여정.

Q. 항상 새로운 캐릭터를 추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래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윤여정 : 지난번에 했던 건 하지 않으려고 한다. 드라마는 속성상 국화빵 찍어내듯 해야 한다. 그게 이치다.

Q. ‘꽃보다 누나’도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도전이고, 추구였다.
윤여정 : 나영석한테 처음 ‘노’를 했던 게 배우로 평가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잘했으면 칭찬받고, 아니면 비평받고 그런 거에 불만 없었다. 내 일이니까. 그런데 예능에서 내 실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댓글로 욕먹고 그런 건 싫다. 내 실생활을 보여주면서 왜 욕먹느냐. 그냥 조용히 늙고 싶다고 했다. 여하튼 나영석이 대단한 인물이다. 나를 함락시켰으니까. 하하.

Q. 결과적으론 좋은 성과였다.
윤여정 : 어디서 배운 걸 흉내 내고 그런 건 싫은데 진정성이 있더라. 단순히 웃고 떠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를 뽑아내기 위해 하는 노력은 상상할 수 없더라. 그 점에 박수다. 나는 모르는 세계였으니까. 근데 빨리 망해야 하는데 안 망하더라. 그런 힘을 길러야 더 올라선다. ‘삼시세끼’에 나간 것도 망할 줄 알고 나갔다. 그에 일조하자 생각했는데, 안 망하더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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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운 기자 jabongdo@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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