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안성기와 임권택 감독

[텐아시아=정시우 기자]작품마다 주인이 있다고 믿는다. 김훈 작가의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화장’은 10여 년 동안 꾸준히 충무로 영화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작품이다. 많은 감독들이 ‘화장’의 언어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이고 싶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거대해서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허진호 감독이 각색 작업을 하며 오랜 시간 품고 있다가 결국엔 떠내 보냈다. 이후에도 적지 않은 감독들이 도전했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포기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김훈의 ‘화장’은 10년 동안 난공불락의 성처럼 영화에 기회를 주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숨바꼭질하던 ‘화장’은 임권택 감독을 만나 비로소 빗장을 활짝 열었다.

소설 ‘화장’이 영화 ‘화장’이 되기까지“운명하셨습니다”로 시작하는 김훈의 ‘화장’은 아내가 죽은 후 화장을 하기까지 장례를 치르는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엔 이렇다 할 커다란 사건의 기복이나 드라마가 없다. 오랜 시간 암세포와 싸우는 아내와 그런 아내를 곁에 두고 젊은 여직원의 얼굴을 욕망하는 한 남자의 생각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인물의 내면을 형상화 하는 일. 소설 ‘화장’이 영화 ‘화장’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 우여곡절을 겪은 이유일 것이다.

소설 속 언어를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임권택 감독이 주목한 것은 제목 ‘화장’이 품고 있는 중의적 표현 같다. 즉 시신을 불태우는 ‘화장(火葬)’과 여성의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 ‘화장(化粧)’이 빚어내는 대립적 이미지를, 생명의 끝을 향해 시들어가는 아내(김호정)의 육체와 봄꽃처럼 피어나는 직장부하 추은주(김규리)의 육체로 치환해 삶의 탄생과 죽음을 길어 올린다. 여기에서 남편 오상무(안성기)가 전립선비대증으로 인해 소변 주머니를 몸에 차고 다니는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찬란한 젊음이라는 ‘이상’에 마음이 끌리지만, 결국 자신의 육체도 소멸을 향해 내달음질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그는 배회하고, 괴로워하고, 고뇌하고, 죄책감에 ‘이러지 말자 ’다짐했다가, 본능에 이끌려 슬그머니 다른 여자의 얼굴을 탐한다. 추은주를 바라보는 오상무와 아내에게 헌신하는 오상무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오상무들이 늘 그렇게 전투를 벌인다. “너희의 젊음은 너희가 잘해서 받은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 또한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은교’ 속 시인 이적요(박해일)의 말이라면 위로가 될까. 한 남자의 마음을 쫓아가는 임권택 감독의 공력이 ‘화장’ 곳곳에서 감지된다.


안성기는 존재자체로 오상무라는 인물에게 일정의 면죄부를 부여하는 느낌이다. ‘바른 생활맨’으로 이미지가 강한 안성기를 기용함으로서 영화는 외설이랄지 불륜으로 비춰질 수 있는 오해들을 일견 막아냈다. 이것은 안성기 아니면 안 되는 부분이다. ‘화장’은 한 배우가 평생 일군 이미지가 자신의 캐릭터와 충돌하여 어떤 기묘한 뉘앙스를 만들어내는가를 목격하는 진기한 장이기도하다.그리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명. 아내를 연기한 김호정이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는 김호정을 만나 역설적이게도 생명을 부여받는다. 특히 오물을 흘린 아내를 남편이 욕실에서 씻겨주는 씬은 ‘노출’로 인해 이슈가 되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 임권택 감독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품고 있는 부분이다. 열등감과 자괴감과 미안함으로 범벅이 된 감정을 온 몸으로 토해내는 아내와, ‘의무와 헌신도 사랑의 일부분’이라고 항변하는 듯한 남편의 손길이 슬프면서도 애틋하다. 욕실장면 촬영이 끝난 후 여배우에게 90도 인사를 전한 노장감독의 마음에 수긍이 간다.

‘진짜 어린’들의 영화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이기도 하지만, ‘접속’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 ‘건축학 개론’ 등을 만든 제작사 명필름의 20주년 작품이기도 하다. 언젠가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한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의 영화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프로듀싱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화장’은 명필름이 먼저 임권택 감독에게 제안을 해서 이루어진 프로젝트다. 그리고 영화 홍보 과정에서 드러나는 거장 감독을 향한 명필름의 세심함과 예우와 존경의 행보는 영화를 상업으로 평가하는 오늘 날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결국 ‘화장’은 김훈이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력과, 소생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 사이의 틈새를 바라보는 임권택이라는 거장의 묵직한 시선과, 명필름이라는 자신들의 인장을 오랜 시간 꼿꼿이 지켜내고 있는 영화사가 모여서 만들어낸 진기한 기록이다. 한마디로 ‘진짜 어른들의 영화’다. 경의를 표할 수밖에.

정시우 siwoorain@
사진제공.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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