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치 않다.” 자타공인 연기 잘하는 배우로 첫손에 꼽히는 최민식이 ‘명량’ 언론시사회에서 뱉은 말이다. 그 누구보다 노련한 최민식마저도 이순신이란 엄청난 무게감을 이겨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더욱이 지독한 그의 ‘욕심’은 그 무게감을 몇 배 가중시켰다. 나 자신이 초라해질 만큼 ‘완벽한 인격체’란 사실에 여러 번 놀랐고, 좌절했다. 개운치 않았다는 말은 이순신이란 인물에 한 발이라도 더 다가서려 했던 그의 진심이었던 셈이다. “말도 안 되는 내 강박”이라면서도, 이순신의 모든 것을 품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큰 울림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의 노력 끝에 이순신은 우리 곁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인터뷰 동안 질문마저 많이 할 수 없었다. 그는 질문 하나하나 정성을 다했다.
Q. 반응이 좋다. 사실 걱정 많이 했을 텐데 한시름 놨겠다. (인터뷰는 ‘명량’ 개봉 전 진행됐다.)
최민식 : 다행이다. 솔직히 우려도 된다. 요즘 관객층이 젊은데, 교과서 같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다. 잘 받아들여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구를 떠나 같이 공유했으면 좋겠다. 물론 상업적으로 흥행을 바라지 않는 배우가 어디 있겠나. 무엇보다 상당히 발전된 기술로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Q. 언론 시사회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개운치 않다”는 말을 했다. 그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최민식 : 그동안 허구의 스토리에 허구의 인물을 연기해왔다. 현실에 있을법한 사람이든, 현실과 무관한 판타지든 내 상상력에 상당 부분 의지했다. 그럴 경우 내가 (연기) 하는 게 곧 정답이다. 평가와 상관없이 좌우지간 그런 믿음 속에 연기했다. 그런데 이 작업은 달랐다. 이해가 될지 모르겠는데, 나 자신이 초라해질 만큼 완벽한 인간과 맞닥뜨리니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싶었다. 또 허구가 아니라 팩트다. 실제 그런 말과 행동을 했고, 전쟁에서 이겼다. 그 사실 앞에 절망한 기분이다. 언론시사회 때 말했지만, 정말 뒤도 안 돌아봐 주신 것 같다. ‘난중일기’를 읽었다고 완벽하게 이해하겠나? 그건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수준에서의 이해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이를테면 죽어서도 만날 수 없는 분이다. 그런 분은 옥황상제 옆에 있지 않겠나. 하하. 그런데 왜 그렇게 알고 싶은지. 말도 안 되는 내 강박이고, 망상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취화선’도 실재 인물이었는데 그땐 뭔가 우쭐함이 있었다. 비슷한 게 많은 느낌이랄까. 창작하는 사람들끼리 자유를 갈망하고, 어떤 구속이나 규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심정적으로 이해됐다. 이건 달랐다. 과욕일 수도 있지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외칠 때 그냥 장수의 느낌만은 아닐 것 같은 거다. 왜 그분인들 두렵지 않았겠냐 이거다. 너무나 위대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게 궁금해지는 거다. 장수 이면에 흔들리는 인간, 그거에 집착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강박도 생겼던 것 같다.
Q. 그간 많은 선배, 동료, 후배 배우들이 이순신 역을 맡아 연기했다. 그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나.
최민식 : 당연히 있다. 우리는 항상 비교당한다. 전혀 작품이 다르고, 캐릭터가 달라도 마찬가지다. 당장 ‘군도’ ‘명량’ ‘해적’ ‘해무’ 등도 서로 비교하고 있지 않나. 하다못해 슈퍼에서 요구르트 하나를 사 먹어도 그렇다. 그거에 기분 나빠하면 안 된다. 태생적으로 비교당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더욱 충무공 이야기다. ‘어디 한 번 잘못 만들어봐라’ 뭐 이런 느낌이다. 부담도 되지만,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 받아들인다. 잘난 체가 아니라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그런데 그보다 더 부담을 느꼈던 건, 대중과 똑같이 과거 역사책을 통해서 알고 있는 이순신이 전부라는 거였다. 참여하면서부터 다시 공부한 건데, 처음엔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를테면, 죽음까지 직면한 열악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충성을 다하고 실천했던 인물인데, 너무 신성시되고 과장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런데 알면 알아갈수록 진짜더라. 완벽한 인격체란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는 거다.
Q. 지금 당장 이순신 하면 ‘불멸의 이순신’의 김명민이 떠오른다. 당시 김명민은 이순신이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했다. 최민식에게 이순신은 어떻게 다가왔나.
최민식 :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다. 결국, 인연 따라가는 거다. 만나질 인연이 되니까 만난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작품이라도 되는 게 아니다. ‘올드보이’만 놓고 보더라도, 유지태가 연기했던 우진 역할을 위해 박찬욱 감독하고 나하고 그 나이 또래 남자 배우를 다 만났다. 결국, 지태가 인연이 됐던 거다. 나 역시 이 작품을 만난 게 인연이다. 나라고 왜 짱구를 안 굴려 봤겠나. 명민이가 워낙 잘해놨기 때문에 잘해야 본전이란 생각도 해봤고, 이런 소재가 요즘 관객들에게 먹힐까, 또 누가 이 제작비를 감당할까 등등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놈의 술이 문제다. 하하. 일 이야기는 커피 마시면서 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김한민 감독이 고등학교 선배가 하는 식당을 데려가서 이런저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더라. 왜 하려고 하는데 했더니 ‘상상만 했던 명량해전을 형상화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라고 하는 거다. 짜릿한 거다. 그 의도가 좋았다.
Q.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최민식 : 울돌목 회오리 바다에서 왜군과 엉겨 붙어 싸운다고 책에 나와 있는데 상상이 안 간다.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어도 제대로 그림이 안 그려지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충무공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시 한 번 끄집어내서 표현해보자는 욕심이었다.
Q. 이순신을 그리는 데 있어 배우 최민식의 고민과 김한민 감독의 고민은 어느 정도 일치했나.
최민식 : 누구보다도 김한민 감독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감독의 구체적인 생각이 제일 중요하다. 거기에 있어서는 합의점을 봤다. 명량해전 전반부 드라마도 첨삭을 공유하면서 했다. 내 강박과 김 감독의 요구수준 그리고 이 이상의 연기자로서 과욕이다. 김 감독이 A라는 수준까지 요구했다면, 나는 적어도 A 플러스, A 플러스에 플러스를 하고 싶은 거다. 단지 더 업그레이드라는 것도 있지만, 더 알고 싶은 거다. 그렇다고 남들과의 차별성을 의식한 건 아니다. 차별성은 생물학적 표현 수단이 달라서 당연히 생긴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존재감에 대한 경외심도 있고, 거기에서 오는 초라함, 그분께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뭔지 모르겠는데 다른 눈빛이 있을 것이다, 다른 떨림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기술적으로 3가지 표현을 했는데, 5가지를 못해서 아쉬운 게 아니다. ‘뒤도 안 돌아 본다’는 게 그런 의미다. ‘본질이’와 술 마시면서 이야기한 적 있는데, 개봉 올려놓고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시점에서 현충사 한 번 가서 마지막으로 인사드리자고 했다. 그게 마지막 순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쭤보려 한다. ‘수고들 했다’ 이런 이야기라도 해주시면 감사하고. 하하.
Q. ‘본질이’라는 게 감독 별명인가. 언뜻 ‘본질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최민식 : 김한민 감독이 ‘이 신의 본질은….’처럼 ‘본질’이란 말을 자주 써서 내가 ‘본질이’라고 별명을 붙였다. 나중엔 조감독이 ‘김본질 감독님 어디 가셨나요’라고 할 정도로 전 스태프가 그렇게 불렀다. 하하. 근데 김한민 감독이 아니더라도 이런 영화를 찍으려면 배우들은 죽어나는 거다.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게 대견스럽다. 또 감독의 말 중 ‘가설은 절대 넣지 맙시다’는 이야기가 와 닿았다. ‘난중일기’에 있는 내용과 이순신을 연구하고, 당시 전쟁사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공통점만을 묘사하고자 했다.
Q. 극 중 도망간 부하의 목을 단칼에 벤다. 그 장면에서 조금 놀랐다. 이순신의 그런 모습이 그려진 게 거의 없었으니까. 정말 그랬을까 할 정도였다.
최민식 : ‘난중일기’에 많이 나온다. 괴로움과 회오리치는 고뇌가 있되 군인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신상필벌이 정확했던 거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굉장히 신임했던 장군이 전사했을 때 피눈물로 쓴 제문이 있다. 또 부하들이 죽으면 항상 제를 지내줬다. 장군이 직접 주도하게 군졸 제를 지내준 거다. 혼돈의 와중에도 지휘관, 리더로서 정확한 기준이 있었던 거다. ‘본질이’가 ‘한산’ 등을 만들 때 이순신의 자애로운 부분을 넣지 않을까. 하하.
Q. 곳곳에서 ‘이순신 3부작’ 이야기가 나오고 있더라.
최민식 : 나는 못 한다. ‘본질이’한테 분명히 이야기했다. ‘열심히 해라. 형이 응원할게’라고. 지금 기분으로는 ‘어휴~ 또 해’ 이런 기분이다.
Q. 사극을 했던 여러 배우가 ‘다시는 안 한다’하면서도 나중에 보면, 또 사극에 출연하고 있더라.
최민식 : 하고 안 하고 여부를 떠나 현실적으로 흥행에 성공해야 누군가가 투자를 하지 않겠나. 그게 우선시 돼야 김 감독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지 않을까.
Q. 왠지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최민식 : 지금은 아닌데 그런 염려는 한다. 김 감독도 내가 강력하게 이야기해서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3부작을 하면, 이미지가 굳어버린다. 내가 ‘악마를 보았다’를 또 하면 되겠나. 대중은 아직도 ‘악마를 보았다’를 이야기한다. ‘사람 죽이던 놈이 이순신을 해’ 그런 식으로. 또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다. 내가 이순신 전문배우도 아니잖나.
Q. ‘악마를 보았다’처럼 살인마 이미지와 달리 이순신 이미지는 좋은 것 아니냐. 평생 가져가도 될 만큼.
최민식 : 물론 영광이고 좋다. 그런데 아직 해야 할 작품이 많고, 캐릭터 욕심이 생긴다. 이런 것들이 매일 생각난다. 획일적인 이미지로 굳어지는 건, 그 순간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 있다. 또 한 명의 일관성도 생각하겠지만, 다른 배우들이 했을 때 비교하는 재미도 있는 거다. 가령 ‘노량:죽음의 바다’ ‘한산:용의 출현’ 등 김한민 감독이 제작하고, 다른 감독이 연출할 수도 있고. 그렇게 유연하게 이순신 프로젝트를 즐길 수 있는 마음이 더 좋은 것 같다.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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