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정도전’에서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

남자 냄새 풀풀 풍기는 사극 한 편에 주말이 뜨겁다. 지난 1월 4일 첫 전파를 탄 KBS1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 이재훈)이 매회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18~19%대(닐슨 코리아 전국 시청률 기준)를 넘나들며 ‘마의 20%’ 돌파를 목전에 뒀다. 그간 KBS 대하사극이 시청률에서 다소 고전을 면치 못했던 전과를 생각한다면 여간 신통방통한 일이 아니다.

‘정도전’ 인기의 포문을 연 건 바로 이인임(박영규)이었다. 50편이 훌쩍 넘는 출연작에도 유독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았던 그는 ‘정도전’의 이인임 역을 통해 ‘미달이 아빠’라는 수식을 완전히 걷어냈다. 현실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대사는 박영규를 만나 힘을 얻었고, ‘이인임’은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악역으로 환생해 ‘정도전’을 달궜다.이인임의 장렬한 최후 뒤에는 임호가 흥행 바통을 이어받았다. 초반부 이인임과 이성계(유동근), 정도전(조재현)의 대립 구도에 가려 다소 존재감이 작았던 정몽주(임호)는 위화도회군과 함께 극의 중심에 섰다.

이 지점에서 임호의 연기 내공은 빛을 발했다. 앞서 다수 사극에 출연했음에도 ‘왕 전문 배우’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임호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를 대쪽 같은 충절과 인간미를 갖춘 인물로 그려내며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외유내강형 인물로 분노와 애절함을 오간 폭넓은 감정 연기는 가히 ‘임호의 재발견’이라 할만했다.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이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처럼 빼곡히 ‘정도전’을 채울 수 있던 데는 이성계로 분한 유동근의 열연이 컸다. ‘변방의 촌뜨기’로 출발한 이성계는 황산대첩, 위화도회군을 거치며 전에 본 적 없는 인간미 가득한 장군으로 그려졌다. 용상에 앉기까지의 과정은 더 극적이었다. 백성을 위한 나라를 꿈꾸던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놓고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두 사람, 정도전과 정몽주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에는 ‘정도전’이 그리려 한 이상적인 군주에 대한 메시지가 오롯이 담겼다. 그가 안정적인 연기로 극을 중심을 잡으니 다른 배우들이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던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과연 ‘정도전’의 타이틀롤 정도전은 어디로 갔을까. 사실 ‘정도전’ 초반부만 해도 타이틀롤을 맡은 조재현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데뷔 이래 연극, 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신들린 연기력을 펼쳐온 그였기에 더 그랬다. 현대극에서는 등에 날개를 단 듯이 훨훨 날았던 배우가 유독 사극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놓고 일각에서는 ‘사극 경험 부족하다’거나 ‘유동근, 서인석 등 사극 장인의 열연에 묻혔다’는 혹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조재현은 역시 조재현이었다. ‘정도전’이 위화도회군까지 달려오는 동안 다소 주춤했던 조재현의 극이 역성혁명의 근처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본주의(民本主義)’가 바로 선 세상을 원했으나, 권력 찬탈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이인임을 닮아버린 정도전의 이면성은 조재현의 철저히 계산된 연기의 가공할 위력을 실감케 했다.

결국, ‘정도전’은 정도전의 드라마이다. 앞서 예고된 대로 ‘정도전’의 끝은 정도전의 죽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종방까지 4회만을 남겨 놓은 시점에 판은 마련됐다. 이인임, 임호, 이성계로 이어진 ‘정도전’의 처절한 이야기는 ‘정도전의 최후’라는 마지막 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이방원(안재모)와 정도전의 대결은 ‘정도전’의 완성도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다. ‘역사’라는 스포일러가 보란 듯이 극의 전개를 알려주고 있는 가운데 배우들의 연기력 하나로 극을 이끌어온 ‘정도전’이 마지막까지 뒷심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KBS1 ‘정도전’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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