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낫 데어’

호빗에게 축복의 키스를 날리는 엘프 블란쳇은 잠시 잊고, ‘블루 재스민’과 ‘모뉴먼츠 맨’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라. 진짜 배우의 민낯과 만날 수 있다.

3월 2일에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고 이슈는 역시 여배우들이다. ‘아메리칸 허슬’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대세녀 제니퍼 로렌스가 작년(‘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여우주연상 수상)에 이어 올해도 수상을 노린다. 지금껏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모두 받은 배우는 메릴 스트립, 제시카 랭 정도뿐이다. 반면 여우주연상 수상이 가장 유력한 배우는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다. 그녀는 2005년에 ‘에비에이터’로 조연상을 수상했으니, 만약 주연상을 받으면 제니퍼처럼 두 상을 모두 거머쥘 수 있다. 이번이 세 번째 시도라서 가능성은 확실히 높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번에서 태어난 케이트는 대선배 멜 깁슨처럼 오스트레일리아국립드라마학교(NIDA) 출신이다. 졸업 후 시드니 씨어터 컴퍼니에 참여했고, 데이빗 마멧의 연극 ‘올레나’(1993)로 주목을 받았다. 그녀가 스크린에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한 것은 ‘엘리자베스’(1998)였다. 우여곡절 끝에(반역과 암살의 음모를 물리침) 왕좌를 안전하게 지키는 엘리자베스 여왕 역할이었다. 당당하게 영국과 혼약을 맺은 ‘버진 퀸’의 탄생기에서 당시 20대 후반의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카리스마를 분출했다. 돌이켜 보면,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제는 두 명의 엘리자베스가 후보에 등장한 일이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한 주디 덴치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만약 케이트마저 상을 받았다면 엘리자베스 여왕 캐릭터가 주연상과 조연상을 받는 일이 발생할 뻔 했다. 하지만 대머리 오스카 아저씨는 기네스 팰트로의 몫이었다.
‘블루재스민’(왼쪽),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

등장하는 영화마다 워낙 걸출한 연기력을 선보이기 때문에 케이트의 대표작을 두 편만 뽑는 것은 힘들지만, 그녀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에비에이터’(2004)와 ‘아임 낫 데어’(2007)였다. 전자에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4번이나 수상한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 캐서린 헵번을 연기했다. 지적이고 감성적이며 당찼던, 심지어 중성적인 매력까지 발산하던 헵번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하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하워드 휴즈 역)의 연인이라기보다는 엄마 같은 느낌으로 그를 압도했다. 케이트의 출생명이 캐서린 블란쳇인 걸 고려하면, 이 역할은 숙명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자에서는 여성 밥 딜런인 주드 퀸을 선보였는데, 밥 딜런이 여성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 분위기였다. 단순히 밥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그와 교감하는 자세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변신보다는 빙의나 환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물아일체의 경지였다. ‘베로니카 게린’(2003)이나 ‘노트 온 스캔들’(2006)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주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연기는 헤븐’(2002)과 ‘커피와 담배’(2003)의 ‘사촌’편이었다. 전자는 잘 알려진 영화는 아니지만, 복수로 살인을 저지르고 지오바니 리비시와 사랑의 도주를 떠나는 여인을 연기했다. 특히 흔하디흔한 흰 티셔츠만 입었을 뿐인데 엘프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후자는 1인 2역을 맡아 사촌지간인 케이트와 셸리로 등장했다. 배우인 자신과 그녀와 티격태격하는 사촌을 연기하는 모습은 마치 도플갱어를 보는 듯 했다.

‘반지의 제왕’ ‘엘리자베스’ ‘에비에이터’ ‘헤븐’(왼쪽 위에서 시계방향)

물론 ‘반지의 제왕’과 ‘호빗’시리즈에선 뾰족한 귀를 붙이고 갈라드리엘로 등장했으니, 그녀를 중간계에선 천상의 피조물로 기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계로 슬쩍 내려온다면, 단연코 최고의 연기는 재스민 캐릭터다. ‘블루 재스민’에서 그녀는 오프닝부터 비행기 안의 옆 여인에게 사랑에 대해 수다를 떤다. 그러더니 결국 홀로 남은 벤치에서 ‘블루 문’을 듣는 신세로 전락한다. 고독한 그녀는 그 노래의 가사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푸른 달이여, 당신은 외롭게 서있는 나를 보았죠”라는 가사는 꿈을 잃은 재스민의 공황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새로운 결혼에 실패하고 멘붕이 된 재스민이 동생 집에서 “난 샤워 좀 해야겠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고전이 있다. 바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다. 이 억울한 여자 재스민은 사실상 우디 앨런표 블랑쉬다. 재스민의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은 정말 애처롭지만 동시에 실소가 나온다. 또 개봉을 앞둔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에서는 죄드폼 미술관의 큐레이터 클레어로 등장해 히틀러가 약탈한 예술품을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맷 데이먼과의 화학작용을 위해, “여기는 파리라서 괜찮다”고 속삭이지만 반듯한 맷이 그냥 심심하게 떠나고 만다. 맷과의 짜릿한 장면이 없어서 좀 아쉬움을 남겼지만, 역시 그녀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최근에는 테렌스 멜릭의 신작과 ‘신데렐라’의 촬영을 마쳤다. 내년 3월에 개봉할 ‘신데렐라’에서 사악한 계모(!)로 변신한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 즐거워진다. 그녀는 어떤 배역을 맡든 놀라운 흡입력과 친화력으로 외유내강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심어놓는다. 그러니 케이트의 연기를 의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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