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90년대는 외화 및 애니메이션의 전성시대였다. 방송·영화계를 휩쓸었던 이러한 열풍의 이면엔 ‘더빙’이 있었다. 지금처럼 자막 기술의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타 언어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지라, 그 시기에는 더빙이 대중의 눈과 귀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더빙이 입지가 높아지자 작품과 함께 성우들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현재 성우들의 입지는 예전 같지 않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추락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지난 6월 2일 KBS2 ‘현대레알사전’에서는 “TV에서 해주는 외국영화란? 입과 말이 따로 노는 것!”이라는 말로 시청자들과 성우들의 빈축을 샀다. 사건은 측이 곧장 사과하며 일단락됐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성우들의 위신은 되돌리기 어려워 보인다. 해당 코너를 맡았던 개그맨들과 방송관계자들의 몰지각한 처사에 대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이러한 인식이 일반화돼 가고 있는 데는 최근 유행처럼 번진 ‘비(非)성우’ 캐스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성우 더빙을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봐야하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배우, 아이돌 등 다양한 직군에서 애니메이션 더빙 시장으로 진출이 활발해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2008년부터 올해까지만 하더라도 성우가 아닌 다른 직군의 사람들이 더빙에 참여한 작품 수는 30편 이상으로 추산된다. 더빙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국산 애니메이션과 미국 애니메이션이 주를 이룬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더빙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두기에 대체로 자국 배우들이 직접 소화하는 경우가 많고, 미국도 애니메이션 대작은 할리우드 유명배우들이 더빙을 하는 추세이다.
일단 더빙을 맡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주로 유명 배우들과 개그맨이 많고 최근에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의 진입이 늘고 있다. 이에 대해 데이지엔터테인먼트의 이성우 부사장은 “요즘은 전문 성우보다는 연예인들의 인지도를 통한 홍보효과를 누리기 위해 비성우 배우를 캐스팅 하는 경우가 많다”며 “대체로 캐스팅을 진행할 때 논의하는 내용은 ‘전부 배우로 갈 것인지 아니면 개그맨이나 아이돌 몇 명을 포함시킬 것인지’ 하는 식으로 연예인 출신 더빙 배우 캐스팅을 전제로 진행하는 편이다”고 전했다. 또 “홍보 효과를 얻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애초에 계약을 할 때부터 언론배급, 무대인사 등의 사항을 넣어서 계약을 맺는다”고 밝혔다.
비성우 배우의 더빙은 애니메이션에 여러모로 재미를 부가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성우 부사장은 “배우들은 확실히 연기력에서 월등한 부분이 있고 개그맨들은 유행어를 쓸 수 있기에 대사의 맛을 살릴 수가 있다. 또 아이돌들은 음악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기에 작품에 따라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또 연예인 캐스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애니메이션의 주 타겟 시청층이 미취학 아동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이노기획의 홍보 관계자는 “미취학 아동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 SBS 이나 KBS2이기 때문에 그들을 기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라고 말했다. 영화관계자들에겐 이러한 캐스팅이 인지도 확보와 친근감 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애니메이션 (왼쪽), 포스터
물론 비성우 배우가 더빙한 애니메이션이 항상 성공적인 성적표를 받은 것은 아니다. 간혹 조악한 더빙으로 인해 작품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자격조차 박탈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더빙 시장에 나선 연예인들은 넘치는 끼를 자랑이라도 하듯, 뛰어난 연기를 펼쳐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실제로 걸그룹 소녀시대의 두 멤버 태연·서현은 (2010)에서 더빙실력을 인정받아 올해 개봉을 앞둔 에 재캐스팅 되기도 했다. 홍보팀 관계자는 “전작에 이어 2편까지 더빙을 맡게 된 이유는 온전히 실력 때문이다”고 밝히기도. 뿐만 아니라 에서 노래와 더빙을 함께 소화한 2AM의 조권은 작품의 감독 엔조 달로에게 “내가 여태껏 들어본 더빙 중에 가장 싱크로율이 높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최근 애니메이션에서도 음악의 비중이 강조되고 있는 만큼 노래 실력과 연기력까지 갖춘 아이돌이 영화 관계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로 자리매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이성우 부사장은 “더빙은 호흡이 중요한데 그런 측면에서 연예인들이 특화된 부분이 있다”며 “비성우 배우들도 전문 성우들의 ‘가이드 더빙’과 영상, 그리고 대본 리딩을 통해 실력을 갈고 닦은 후에 더빙에 임하기 때문에 길어도 하루면 더빙이 끝난다”고 귀띔했다.하루에도 몇 편씩 애니메이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럴수록 더빙이 점점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능력 있는 이들이 다른 분야에 자유롭게 진출하는 것을 막을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연예인 개런티에 비해 전문 성우의 개런티가 지나치게 낮은 점이나 일부 전문 성우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공동의 노력을 통해 개선해 나가야할 부분이 아닐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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