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방송화면

MBC 월화특별기획 23, 24회 2013년 6월 24,25일 오후 10시

다섯 줄 요약
소정법사(김희원)의 예언대로 여울(배수지)이 죽을까 두려운 강치(이승기)는 여울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이순신(유동근)을 죽이려는 조관웅(이성재)은 여울을 납치해 기회를 노린다. 강치는 어렵사리 여울을 구해내며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만, 조관웅과 대치하던 중 잘못 조준된 조총에 여울이 맞는다. 함께 했던 이들과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여울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강치는 사람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신수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422년이 흐른 뒤 현대에서 환생한 여울과 만난다.리뷰
장구한 서사로 시작됐다. 구월령(최진혁)과 서화(이연희)의 이야기는 얼핏 ‘오이디푸스 신화’의 느낌마저 짙게 풍겼고, 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설화 이상의 웅장함이 느껴졌다. 이어 등장하는 ‘반인반수’인 강치는 영웅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는 인물이었고, 여기에 역사 속에 실존하는 이순신까지 등장시키며 ‘굉장한 서사’를 풀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거기에 어른들의 세대로 대표되는 사군자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젊은 세대의 갈등까지 훌륭하게 깔아 두면서 거의 완벽하다 할 만큼 테이블 셋팅을 마친 상태였다. 그 뿐인가. 저잣거리의 ‘건달’ 하나까지도 캐스팅에 공을 들인 덕분에, 시너지가 일었고 적어도 초반까지는 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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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반부터 는 밥상이 너무나도 잘 차려져 있던 탓에 다 먹고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 둔 서사의 무게감과 부담감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초반 욕심을 부리며 이순신 장군까지 끌어들여 키워놓은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하기에 이른 것이다. 태서(유연석)와 청조(이유비) 캐릭터는 어느덧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악역 조관웅에게 잡아 먹혔고, 덕분에 강치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조금씩 흐려져 갔다. 좋은 캐릭터와 배우들이 많다 보니 각 캐릭터가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느라 정작 제대로 끌고 가야 할 ‘강치와 조력자’들을 제대로 잡아가지 못했고, 초반 좋은 분위기를 이끌었던 구월령과 자홍명(윤세아)까지 다시 극으로 끌려 나오면서 는 강치의 드라마가 아니라 구월령의 드라마로 거의 잡아 먹힐 뻔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극에 대한 부담감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등장한 구월령과 자홍명이 다시 드라마의 중심을 잡았고, 결국 이처럼 호흡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겨우 강치와 여울로 시야를 좁혀 이들의 ‘멜로’나마 이야기를 어느 정도 정리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주변에 숨어있던 좋은 에피소드들은 이처럼 시야를 좁히는 과정에서 어김없이 희생당해야만 했다. 이처럼 공들인 캐릭터가 오히려 드라마 전체의 팀플레이를 방해하게 된 상황에서 결국 는 ‘과유불급’의 길을 몸소 보여준 셈이 됐다.결정적으로 의 이 모든 실수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실수는 제목이자 드라마의 가장 큰 의미인 ‘구가의 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부담에 휘청거리며 극이 흘러가는 동안 제목인 ‘구가의 서’는 그 명분도 존재도 목적도 잃은 채 부유하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것에 맞아 떨어진 소정법사의 예언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정도로 ‘구가의 서’는 존재감을 잃은 것이다. 제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때문인지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구가의 서’가 언급되기는 했지만, 정작 ‘구가의 서’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강치는 태서와 청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여울 때문에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때문에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간절함도 그만큼 반감됐다. 아버지 구월령이 단순히 ‘사랑’ 때문에 ‘구가의 서’를 그토록 갈망했다면, 적어도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과 어울리며 반은 사람으로 살아온 강치는 더 확장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물론 이러한 메시지들이 몇몇 캐릭터의 대사로 그럴 듯 하게 그려졌지만, 그 모든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엮여 강치를 통해 그려져야 비로소 힘을 받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 드라마는 그럴듯한 ‘이미지’의 구성에만 치중했을 뿐 정작 이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의도가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중심이 되어야 할 ‘구가의 서’는 무너지고, 이미 충분히 화려한 가지들은 더욱 더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에만 바빴으니 결국 극은 갈 곳을 잃고 무너졌다. 에 ‘구가의 서’가 없으니, 과연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허망함을 느끼는 건 이제 오히려 당연하게 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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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허망함의 증거는 ‘환생’의 키워드를 사용한 황당한 결말로 이어졌다. ‘구가의 서’를 날려버린 자리에 이제 남은 건 강치와 여울의 사랑뿐이니, 결국 이들을 어떻게든 이어줘야 하는 상황에서 드라마는 ‘환생’이라는 무리한 코드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를 환생시키는 기이한 진풍경까지 보여주며 스스로의 드라마가 얼마나 허술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했다. 결국 환생한 여울을 다시 보고자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 422년 만에 강치는 람보르기니를 탄 회장님이 되어 있고, 주변 캐릭터들은 무의미한 방식으로 오로지 ‘재미’만을 위해 소모됐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굳이 비춘 건 화룡점정이라 말하고 싶다) 결국 본인의 이름을 갖고 환생한 유일한 인물인 여울과 강치가 다시 만나는 과정만을 위해 이들은 그토록 먼 길을 달려온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충분한 개연성이 담보됐다면, 이러한 ‘환생’의 현실도 인상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졌어야 할 이 드라마의 ‘명분’이 사라진 자리에, 람보르기니를 타는 강치의 모습은 그저 황당하게 느껴질 따름이다.앞선 23부 그리고 24부 초반까지에 이르는 모든 내용들을 싹 다 기억에서 날려버리고 오로지 뒤의 10분만을 남긴 이 드라마의 능력은 어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장구히 깔아 둔 이야기를 단 한 순간에 허구의 그것으로 만들어 버린 능력 하나는 ‘대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구가의 서’가 없는 드라마 는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내가 살아왔던 모든 세계가 결국은 ‘가짜’라고 말했던 ‘매트릭스’처럼 우리가 보아온 모든 이야기가 가짜인 양 허망함만 남았다. ‘맥거핀’이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계산되어 있었다는 소리니 차라리 과분하고, 적어도 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이야기의 최후는 결국 이렇게 맞이하게 된다는 교훈 하나는 확실히 남긴 듯 하다.

수다 포인트
- 이순신 장군은 모피어스, 소정법사는 오라클, 강치는 네오, 여울이는 트리니티, 조관웅은 스미스요원… 뭐 그쯤 되니 이제 우리 모두 목 뒷덜미 튜브를 뺄 시간이 된 건가요?
- 그 와중에 여주댁과 마봉출까지 환생을 했는데 청조는 어찌 환생도 못했는지…
- 살아남은 건 결국 구월령과 자홍명(서화) 뿐이군요…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나은 거였어 OTL
- 제작진은 아마 이 그토록 부러웠던 게 아닐까, 애써 위안하는 1인

글. 민경진(TV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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