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에서는 어떤 열매가 열릴까. 5월 11일 개막하는 뮤지컬 는 그 열매가 궁금한 나무다. 나무의 뿌리는 ‘신라시대에 남자 기생이 있었다면’이라는 도발적인 가정이다. 부와 권력을 쥔 여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이들의 고단함과 함께 살기 위해 그 직업을 택해야만 했던 두 남자의 삶은 가지가 된다. 해금선율에 맞춰 흔들린 가지에는 이윽고 핏빛 눈물의 열매가 맺힌다. 3월의 목련처럼 처연한 눈빛의 김재범은 소중한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사담 역을 맡았다. 하지만 슬픔만이 그의 정서가 아니듯, 인터뷰 내내 문장과 문장 사이를 타고 흐르는 미묘한 리듬과 불쑥 튀어나오는 은근한 농담, 그리고 농담 뒤에 숨은 진짜 이야기는 그를 더욱 흥미로운 이로 느끼게 했다. 만큼이나 김재범이라는 나무가 맺을 열매가 무척 궁금해졌다.늘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봐야겠다. 2006년부터 거의 끊이지 않고 공연을 하는데 대체 언제 쉬나.
김재범: 나도 어디 좀 쉬러 가고 싶다. 근데 매번 딱 겹쳐버린다. 끝나자마자 또, 끝나자마자 또. 그리고 재공연이 잦아서 작품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텐데 워낙 좋은 작품들이고 어떻게 바뀔 거라고 하면 관심도 가고, 다시 하면서 새로 느끼는 것들이 있다 보니 제안을 마다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는 으로 데뷔한 후 학교로 돌아갔다가 다시 뮤지컬을 시작하게 해준 작품이고, 는 내 이름을 좀 더 알리게 해준 작품이라 애착도 많다. 그런 점에서 의리를 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는 동성애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지난 3-4월에도 공연과 연습을 병행했는데, 두 작품의 성격이 많이 달라서 어렵진 않았나.
김재범: 다른 성격 때문은 아니고 몸이 좀 힘들긴 했다. (웃음) 그래도 는 그동안 같이 작품 했던 애들도 있고, 학교 동문들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뮤지컬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그린 안타까운 작품이다. ‘풍월’(風月)이라 불리는 남자 기생이라는 점에서 , 한 남자를 두고 다른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라는 점에서 얼핏 느낌도 난다. 진짜로 여자가 진성여왕이기도 하고. 의 동성애적인 느낌도 있을 수 있다. 처음엔 나도 생각나지 않나? 싶기도 했는데, 연습을 하면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생이라는 설정도 주된 이야기가 아니고, 단지 직업으로만 쓰인다.
그동안 다음에 , 다음에 을 하는 식으로 극단을 오가는 작품을 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서 전작의 이미지를 지워야한다 같은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김재범: 꼭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지만, 작품을 연달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와 잘하는 걸 보여줘야겠다. 배우 개인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고, 작품을 생각하면 지난 작품과 비슷하더라도 내가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걸 보여주는 게 낫지 싶고. 사실 아직까지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그래도 크게 보였던 습관 같은 것들은 바로 다음 작품에서는 하지 말아야겠다, 정도는 있다.
는 작년에 리딩을 가졌던 작품인데 당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나.
김재범: 그때는 전혀 몰랐다. 작년에 (정)상윤이랑 (김)지현이랑 같이 를 했었는데 둘이 리딩을 했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인터넷으로 봤는데 정상윤이다! 지현이도 나온다! 원종환이 심각한 노래를 부른다! 그냥 이랬었다. 짤막하게 노래만 담긴 영상이었고,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까 딱 그 정도였던 거다. 친한 애들이 많이 나와서 그냥 배우들에게만 집중해서 봤던 것 같다.
그럼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해 알게 된 건 언제였나.
김재범: 2010년에 으로 인연을 맺었던 이사님이 계신데 를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길래 정상윤이다! 라고 했던 영상을 다시 봤다. 그때는 준비 중인 작품도 있었고, 맡게 될 사담이라는 캐릭터가 유약해 보이기도 해서 못할 것 같다고 했었다. 지금 가진 이미지도 좀 비리비리한데 (웃음) 내 이미지를 못 박는 결정타가 되겠다 싶었으니까.
왜소한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나 보다. (웃음)
김재범: 살도 잘 안찌는 편이고, 그렇다고 근육이 막 있는 것도 아니고. 좋지 않다. (웃음) 너무 말라보이면 없어 보이고, 자꾸 연약한 캐릭터가 들어오니까. 그래서 헬스를 좀 해보려고 끊었는데 못 가고 있어서 돈이 많이 아깝다. 힘들어. (웃음) 졸리고 힘들고 피곤하고.
그런데 작품을 하게 된 걸 보니 사담 캐릭터에 변화가 있었나보다.
김재범: 그때 이후로 잊어버렸었다가 스태프 대상으로 한 리딩을 도와주러 갔는데 유약한 것 같던 사담이 무뚝뚝하고 감정표현 별로 없는 경상도 남자 같은 느낌으로 변했다. 그리고 남들이 우려하는 대로 동성애가 주가 되는 작품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좀 더 관심을 갖게 됐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다른 남자와 여자의 삼각관계라는 설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는데 사담과 열의 관계는 어떤 건가.
김재범: 둘은 어렸을 때 만났는데 둘 다 거지였던 거다. 사담이 좀 더 현실적인 거지였다면 열은 거지 주제에 자존심만 세서 남에게 굽히지 않는 거지. 소굴에 같이 있었을 수도 있다. 우두머리가 있었을 텐데 열은 대들었고 그런 열을 사담이 챙겨주고 그랬을 거다. 열은 사담이 거지의 삶을 비관해 자살하려던 때 그를 구해주고. 그렇게 서로 친해지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풍월이 모이는 운루의 운장이 여왕이 좋아할 관상이라며 열을 길거리 캐스팅한다. 그때 열이 사담만은 기생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조건을 걸고 같이 간다. 이렇게는 살 수 없으니까. 같이 살기 위해 운루에 들어가는 거다. 두 사람에게는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가 삶이 되어버린거지. 사실 대본에는 이런 얘기가 살짝살짝만 나온다. 널 먹여 살린 건 나다, 왜 나를 살렸어, 뭐 이 정도.
언뜻 짝패 같기도 하다.
김재범: 남자들이 그런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정신적으로 필요로 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만 딱히 티내지 않는다. 고마워도 매번 틱틱거리기만 하고 정작 ‘고맙다’라는 말을 못한다. 결국 운루에서 열이 진성여왕의 사랑을 받게 되는데, 그를 갖고자하는 여왕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사담의 목숨을 원하게 된다. 그때도 얘기하면 될 것을 묵묵히 있다가 그냥 죽으러 간다.
설정은 독특하지만 내용적으로 따지면 삼각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이런 작품일수록 깊이와 비극에 이르는 과정을 촘촘하게 그려야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다.
김재범: 나를 믿어야 된다. 이번에 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드라마를 못 보다가 공연 전에 봤는데 아이 참, 공유 씨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매력적이었다. 근데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웃음)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해봤다가 결국은 내가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유 씨랑은 다르지만 까칠하면서도 빈틈 많은 한결이 나오게 된 거다. 결국은 완벽한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그런 캐릭터가 있다고 관객들이 믿을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나를 믿는 게 중요하다. 내가 나를 못 믿는데 어떻게 관객이 그 역할을 믿을 수 있겠나.
“엄청난 상상력과 메시지가 있는 만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뮤지컬이 상업적 장르인 만큼 흥행이나 관객평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지 않나. 특히 요즘은 무대 밖에 있던 사람들이 유입되기도 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뮤지컬로 바꾸는 경향도 많으니 말이다.
김재범: 흔들릴 때가 좀 있었다. 관객평을 보고 ‘왜 이해를 못하지?’ 혹은 ‘이렇게 해야 되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작품 자체가 흔들릴 것 같았다. 어느 날 에 나오는 빌 코스비 아저씨가 했던 ‘모두를 만족시키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너무 와 닿았다. 공연장에 오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고,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거다. 모두를 만족시키면 정말 좋겠지만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좋게 본 190명이 있는데 싫어하는 10명을 위해 바꿀 순 없다. 그래서 역시 나를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힘이 될 때가 있지 않나. 그런데 속을 잘 드러내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
김재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속마음이나 진지한 얘기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진짜 친한 친구들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혼자 삭히는 스타일이다. 굳이 그래야겠다고 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다 보니 이제 얘기하기도 그렇고, 남들도 날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데 굳이 얘기해야 되나 싶기도 하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지 싶다가도 나이를 들다보니 외롭기도 하고, 얘기할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안타깝고 왜 이렇게 살았었나 싶기도 하고. (웃음) 갑자기 성격 바꾸는 것도 쉽지 않고.
그래도 다행히 이번 작품에는 친한 배우들이 많지 않나.
김재범: (성)두섭이 같은 경우는 2007년부터 알았는데 5년간 본 거 보다 요 근래 한 달 사이에 부쩍 더 많이 봤다. 그동안 작품을 같이 했어도 같은 배역이라서 공연을 시작하면 볼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 유난히 같은 역을 계속 하길래 두섭이한테 캐릭터 나랑 겹치는 거 같으니까 3년 정도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면 안 되겠냐고 얘기했었다. 그랬더니 싫다고 하더라 건방지게. (웃음) 그래서 가까워질 수 없구나 싶긴 했는데 하면서 가까워졌다. 그리고 (김)대종이 같은 경우는 작품도 네 개 정도를 같이 했고, 내가 한예종 98학번이고 대종이가 99학번이라 12년을 봤는데도 아직 벽이 있다. 후후. 단 둘이 차를 마시기에는 껄끄러운 그런 거. (웃음) 벽이 있는 사람이 참 많은 것 같다.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라 그동안 혼자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최근 합류한 소속사가 도움이 되겠다.
김재범: 타매체에서 연기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뛰어다녀야 하는데 계속 공연 하고 연습하니까 시간도 없고. 최근에 소속사에 들어가면서 그런 기회들이 생길 수 있겠구나 싶었다. (김)수로 선배가 있는 곳인데, 선배도 어렵게 배우를 시작했고 연극도 하셨으니 내 입장에서 이런 저런 것들을 많이 생각해주신다. 공감 되는 부분도 많고. 예전에는 막연하게 하고 싶고, 할 거에요! 라는 말뿐이었다면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된 거다.
배우를 포함한 창작자들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만큼 끊임없이 자극이 필요한 일인데, 어디서 도움을 받는 편인가.
김재범: 요즘 사담을 같이 하는 (신)성민이를 보면 자극을 받는다. 몸이 되게 좋아서. (웃음) 사실 경력이 좀 쌓이다보니 보여줘야지, 보여줘야지 이런 게 있었는데 그 애를 보면서 그런 게 없어도 충분히 기쁘고 슬플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무뚝뚝하면서도 그 안에 외로움과 슬픔이 막 드러난다. 그리고 만화책 보는 걸 좋아한다. 만화는 쉬는 날 쌓아놓고 보는 게 묘미인데 쉬는 날이 없다. (웃음) 새벽 4-5시까지 쉬지 않고 봤던 건 이랑 . 도 재밌게 보고 있다. 만화하면 좀 얕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는 엄청난 상상력과 메시지가 있다. (웃음)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연기도 되게 잘하고. 장면 장면 사이를 상상력으로 연결하다보니 연출이나 연기가 참 좋다. (웃음) 만화처럼 생각할 때가 있는데 연출님들이 그래서 너무 만화 같다고 하실 때도 있고.
에서 은찬이랑 처음 키스한 다음 날 사슴처럼 껑충껑충 뛰어 들어오던 때처럼?
김재범: 그건 좋으니까. (웃음)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서 막 로맨틱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코미디를 좋아하기도 하고 재밌으면 관객들이 더 좋아하시기도 해서 로맨틱보다는 코미디에 좀 더 방점을 찍는 것 같다. 그런 장르에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런 걸 웃음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로맨틱 코미디에는 멋있는 분들이 많이 나오시는데 난 좀 모자라는 것 같고. (웃음) 모자라고. 왜 쟤 멋있는 척 해? 하는 얘기 들을 것 같고. 그런 척도 잘 못하겠다. 공연하면서는 그렇지 않은데 연습할 때는 되게 쑥스럽다.
몰입도가 좋은 편인가보다. 그럼 처럼 감정소모가 많은 작품은 어려움이 있겠다.
김재범: 연습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고, 특히 진성여왕 신은 차마 보지 못하고 연습실 밖으로 나간적도 있다. 왕이지만 그래서 더 외로운 사람이고, 게다가 피부병도 있다. 여자로서 얼마나 속상하겠나. 그때는 피부과도 없었을 텐데. (웃음) 나중엔 진성여왕을 해보고 싶다. (웃음)
사담과 열은 서로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관계인데 만약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나.
김재범: 신라시대에 태어나고 거지로 살아봐야지 그 정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웃음)
글. 장경진 thre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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