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래비티’ 스틸 이미지

‘더 히트’에서 ‘헛똑똑’ 수다쟁이 요원으로 코미디의 힘을 보여준 그녀가 ‘그래비티’에선 우주의 무중력과 맞서면서 삶의 진정한 무게를 고민한다.

“아니, 도대체 언제적 산드라죠? 산다라 박이면 몰라도?”

2009년 여름, ‘프로포즈’의 내부 시사를 보러 오라는 디즈니 픽쳐스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내뱉었던 말이다. 뉴욕의 모 출판사 편집장이자 고지식한 노처녀로 그녀가 출연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마녀 여상사와 귀요미 남자 부하 직원의 러브 스토리라? 아, 아무리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도 그렇지. 한 번 상상해 보시라. 열두 살이나 어린 라이언 레이놀즈가 그녀와 키스하려면 얼마나 곤욕일까! 그저 민폐 캐릭터로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40대 중반의 그녀는 ‘프로포즈’로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제2의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 스틸 이미지

바로 이어서 ‘블라인드 사이드’가 등장했다. 가난한 흑인 소년 마이클을 미식축구 선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리를 연기했다. 엄청난 흥행은 물론이고 처음 후보에 오르자마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20대 산드라 블록은 내가 본 최악의 배우였다. 그녀의 연기 수준은 실베스타 스텔론보다 못했고,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는 얼굴 표정은 키아누 리브스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평범한 외모(특히 다부진 턱선)를 보면서 늘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배우였다. 운 좋게 ‘데몰리션 맨’(1993)과 ‘스피드’(1994)에 무임승차하는 바람에, 서른 살에 주목을 받은 늦깎이 배우였지만, 그녀는 준비된 게 많지 않았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나 ‘투 이프 바이 씨’(1996) 같은 로맨스 영화에 출연하면서 ‘멜로의 신성’처럼 포장됐지만, 예쁜 척하는 모습이 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영화 ‘크래쉬’ 스틸 이미지

그나마 ‘미스 에이전트’(2000) 시리즈에서 FBI요원 그레이시로 나와서 천방지축 코미디를 펼치는 게 좋았다. 코미디에 점점 익숙해진 그녀는 어느덧 ‘백인 에디 머피’처럼 입심이 생겨났다. 그 와중에 폴 해기스의 ‘크래쉬’(2004)에 출연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방 검사의 아내 진으로 등장한 그녀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이기적인 백인 중산층(와스프)의 속물근성을 표출했다. 누구 봐도 “재수 없어!”라고 불릴 만한 캐릭터지만,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배우의 포스를 지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크래쉬’의 연기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준 면도 있다. 당당하고 신념이 넘치는 백인 여성 리는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는 일을 통해 세상의 차별과 맞선다. 감동적인 스토리보다 즐거운 것은 톡톡 튀는 산드라의 연기였다. 산드라보다 후배인 줄리아 로버츠가 ‘에린 브로코비치’(2000)에서 두 번의 이혼 경력과 은행 잔고가 16달러뿐인 여자로 등장했을 때, 보여주었던 변화만큼이나 신선했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줄리아와 산드라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진짜 배우가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의 스타로 분류될 뿐이었다. 재미있는 사건 중에 하나는, 산드라가 ‘블라인드 사이드’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동시에, 코미디 ‘올 어바웃 스티브’로 골든 래즈베리 여우주연상(최악의 영화에 주는 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여배우로서 한해 최고의 상과 최악의 상을 동시에 받은 셈이다. 어쩌면 이것이 산드라의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정확한 사례다. 아무리 아카데미가 인정한 배우라고 해도, 그녀가 ‘여성 벤 스틸러’라고 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영화 ‘더 히트’ 스틸 이미지

지천명(오십 살)을 바라보는 산드라는 올해도 두 편의 문제작을 내놓았다. 하나는 코미디 범죄극 ‘더 히트’다. FBI 특수요원 사라로 등장해 보스턴 경찰을 연기한 뚱뚱녀 멜리사 맥카시와 호흡을 맞추었다. ‘탱고와 캐시’의 여성 버전(여성 버디 무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라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잘난 체 하는 덕분에 ‘요원계의 왕따’다. “매보다 사랑이 낫다“고 주장하지만, 옆집 고양이나 껴안는 신세다. 4천만 달러의 저예산영화지만, 미국 박스오피스에서만 1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효자손 역할을 똑똑히 했다. 또 하나는 지구인들에게 극도의 우주 체험을 선사한 ‘그래비티’다.

영화 ‘그래비티’ 스틸 이미지

한국에서만 관객 250만 명을 돌파한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은 이미 입증이 됐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11)에서 9.11테러로 갑자기 남편 토마스(톰 행크스)를 잃은 여인 린다로 등장한 바 있다. 철부지 아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순 없어!”라고 외치던 그녀는 ‘그래비티’에선 아이를 잃은 엄마로 등장한다. 다행히 여기에선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맷(조지 클루니) 덕분에 힘을 얻는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지만, 90분 동안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그녀가 월*E처럼 소화기로 우주를 유영하는 모습이나 엔딩에서 해안가의 흙을 잡고 일어서는 광경은 정말 짜릿하다. 혹자는 라이언 캐릭터가 누구나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스타도 산드라만큼 소화할 순 없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조용히 빛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진솔한 느낌 때문이다. 이건 산전수전 다 겪은 언니만의 삶에서 나온 것이다. 2010년 이혼 후, 흑인 아이를 입양해 싱글맘으로 살고 있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이은아 domino@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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