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놀라울 뿐입니다. 1978년에 한국에서 이런 녹음이 진행됐다는 사실이 말이죠. 아마도 한국 최초의 모던재즈 앨범이 아닐까요?”

이야기를 꺼내는 비트볼뮤직 이봉수 대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표정이다. “약주를 드시고 녹음을 하러 스튜디오로 들어가셨다고 해요. 미8군 무대, 손님 없는 클럽에서 애정을 가지고 연주해온 재즈를 난생 처음 실제로 녹음한 순간인거죠. 기분이 어떠셨을까요?” 눈앞에 있는 소주잔을 비우고 음악을 들어봤다. 이제껏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아리랑’의 재즈 버전이 들려온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이게 35년 전 한국 연주자들의 연주라고? 믿기지 않았다.

이봉수 대표가 들려준 앨범은 ‘JAZZ – 째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 가요, 팝송’(이하 째즈)으로 1978년에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지금은 ‘한국 재즈의 대부’로 존경받는 이판근이 연주자들을 모았다. 강대관(트럼펫), 김수열(색소폰), 최세진(드럼), 손수길(피아노), 이수영(베이스) 다섯 명이 퀸텟(5인조)를 이뤄 연주를 했다. 2008년에 작고한 최세진을 비롯해 강대관, 김수열은 한국 재즈 1세대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 전대미문의 음반을 기획한 제작자는 엄진. 그는 70년대 음반기획사 ‘포시즌’의 기획자로 한대수, 윤복희, 윤항기, 박상규 등의 음반을 히트시킨 당대의 프로듀서였다. ‘째즈’는 1979년 2월에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최초 발매: 엔젤프로덕션/대한음반제작소, 엔젤 카탈록 번호: AG-0003(LP) / AG-111(TAPE)) 하지만 재즈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미약했던 때라 이 음반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김수열

이봉수 대표는 2010년경 재즈평론가 황덕호 씨에게서 이 음반을 건네받아 듣고 재발매를 결심했다. 황 씨는 1999년 라디오 방송국에서 만난 최세진 선생에게서 이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최세진 선생님이 ‘예전에 이판근이 편곡을 해서 연주한 ’Jazz‘라는 앨범이 있다. 한국 최초의 모던재즈 음반일 것’이라고 단언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주위에 수소문을 해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연주를 하신 분들도 정작 그 앨범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더라고요.”

그 미지의 앨범 ‘째즈’가 발견된 곳은 재즈 월간지 ‘엠엠재즈’ 사무실. 당시 김희준 엠엠재즈 편집장이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해 황덕호 씨에게 건넸다. 음악을 들어본 황 씨는 깜짝 놀랐다. “이전까지 강대관, 김수열 등 한국 재즈 1세대 분들의 최초의 재즈 녹음은 1989년에 나온 ‘박성연과 Jazz At The Janus’로 알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1978년에 녹음된 이 앨범을 들어보니까 이건 뭐 게임이 안 되게 연주가 훌륭한 거예요. 너무 흥분되는 순간이었죠.”

황덕호 씨를 통해 ‘째즈’를 접한 이봉수 대표는 거기에 실린 ‘아리랑’이 귀에 익었다. DJ소울스케이프가 샘플링한 믹스CD에서 들었던 그 연주였다. 뭔가 운명적인 것을 감지했을까? 재발매를 결심하고 작년 말부터 제작자 엄진을 수소문했다. 안타깝게도 엄진은 1988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앨범의 마스터테이프도 소실된 상태였다. 이 대표는 엄진의 유족에게 앨범 발매 권리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시장을 샅샅이 뒤져 비교적 음질이 좋은 LP를 여러 장 구해 음원을 추출했다. 이와 동시에 이 대표는 가요제작자 엄진이란 인물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엄진 선생의 주변 인물들에게 여쭤보니 고인은 대단한 재즈 애호가였다고 해요. 술을 마시면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의 연주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고요.”

엄진은 일면식이 없었던 이판근에게 찾아가 재즈 앨범 제작을 의뢰했다. 자신의 곡 ‘빈 바다’와 ‘가시리’를 재즈로 연주해달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주문이 없었다. 연주자 구성 및 선곡, 편곡은 이판근이 맡았다. 엄진이 왜 재즈 앨범 제작을 기획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한편 이판근은 평소 자신이 추구해왔던 한국적인 재즈, ‘코리안 스피리추얼 재즈’를 이 앨범에 불어 넣으려했다. 미8군, 그리고 손님이 빠져나간 클럽에서 20여년의 세월동안 묵묵히 재즈를 연주해온 연주자들은 난생 처음으로 재즈를 녹음할 기회를 맞은 것이다. 재즈는 순간의 음악이라고 하던가? 약주를 한 잔 걸치고 스튜디오에 들어간 연주자들은 그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마법과 같은 연주를 남겼다.

앨범 ‘째즈’의 역사적인 가치에 대해 황덕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도 한국연주자들의 재즈 녹음은 있었습니다. 60년대에 엄토미가 스몰캄보로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작곡가 손석우의 노래를 베니 굿맨 스타일의 스윙재즈로 녹음한 기록도 남아있죠. ‘째즈’는 모던재즈, 그러니까 비밥이라는 음악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은 재즈가 한국 연주자들의 손을 통해 기록된 최초의 녹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스타일의 재즈가 처음으로 한국 연주자들의 손을 통해 연주된 것이죠.”

김희준 엠엠재즈 편집장은 “1978년도에 한국에서 이런 수준의 재즈가 연주됐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편곡과 임프로비제이션(즉흥연주)이 훌륭하다. 그 시대 녹음 자료들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당시 한국 재즈 연주자들의 수준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런 면에서 ‘째즈’ 앨범은 한국 재즈 역사의 증거물로써 가치가 크다”라고 말했다.

강대관

‘째즈’ 앨범에는 한국이라는 지역의 색이 강하게 배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황덕호 씨는 “‘째즈’에는 60년대에 나온 존 콜트레인의 모달 재즈, 7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 록 스타일이 불균질하게 섞여 있어요. 여기에 한국 민속음악의 맛이 배어있습니다. 이 연주가 당시 우리나라 가요 녹음방식이었던 사이키델릭의 질감으로 레코딩이 됐어요. 덕분에 전혀 상상도 하기 힘든 스타일의 연주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죠.”

또 한 가지 ‘째즈’ 앨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피아니스트 손수길의 존재다. 손수길은 한국 재즈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앨범에서는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천재라고 불렸던 손수길은 70년대까지 재즈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의 밴드에서 활동했다. 이정식이 세상을 떠난 후 손수길은 재즈를 접고 KBS 관현악단에 들어가 음악활동을 이어나갔다.

이봉수 대표는 이판근, 김수열, 손수길 선생님 등 녹음에 참여한 연주자들을 직접 만나 당시 상황들을 퍼즐조각처럼 짜 맞춰 나갔다. 녹음 당시 연주를 한 퀸텟에게는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었다. 이번에 재발매되는 앨범 ‘째즈’는 ‘이판근과 코리안째즈퀸텟 ‘78’의 이름으로 선보여지게 된다. “연주자 본인들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LP를 직접 보여드리니 표정이 환해지셨어요. 재즈계를 떠났던 손수길 선생님도 본인의 재즈앨범 발매에 대한 열망을 계속 가지고 계셨더라고요. 이제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만 남아 있는 분들과 함께 앨범 발매를 축하하는 공연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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