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부터 2023년까지 청룡영화상의 진행자였던 김혜수
30여년의 여정들을 되돌아보며
30여년의 여정들을 되돌아보며
"우리 영화가 얼마나 독자적이고 소중한지, 진정한 영화인의 연대가 무엇인지 이 자리를 통해 알게 됐고, 매년 생생한 수상소감을 들으면서 많은 배우들의 경외심과 존경심을 이 무대에서 배웠다. 앞으로 시상식 없는 연말을 맞이할 저 김혜수도 따뜻하게 바라봐 주시길 바란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늘 저와 함께 했던 청룡영화상이다. 여러분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유의미했고 저에겐 큰 영광이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청룡의 여인, 김혜수가 2023년 제44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을 끝으로 진행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되어준 동시에 영화제의 권위와 품격을 높인 김혜수. 1993년, 만으로 22살의 앳된 나이에 제14회 청룡영화상 진행을 맡았던(1998년 19회만 제외. 배우 심혜진이 MC) 김혜수는 매년 이맘때 청룡영화상과 함께 돌아왔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청룡영화상에서 햇수로 30년 동안, 김혜수는 늘 같은 자리에서 영화인들과 함께했다. 특유의 센스 있고 가슴 뭉클한 말들은 '왜 김혜수가 청룡의 여인인지'를 되새기게 했다. 1970년생으로 올해 53세인 김혜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청룡에서, 영화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흡하기도 했다. 매년 이맘때,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을 포근한 말들로 혹은 기꺼이 두 팔 벌려 안아주셨던 김혜수는 이제 청룡영화상의 진행자 자리에서 떠난다.
진행자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김혜수는 연기자로서도 청룡영화제에서 많은 상들을 받기도 했다.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에서 영화 '첫사랑'으로 최연소 여우주연상을, 1995년 제16회 청룡영화상에서 영화 '닥터 봉'으로 여우주연상을, 2006년 제27회 청룡영화상에서 영화 '타짜'로 인기스타상과 여우주연상을, 2011년 제32회 청룡영화상에서는 영화 '이층의 악당'으로 인기스타상을, 2023년 제44회 청룡영화상에서는 청룡영화상을 수상했다.
"김혜수를 청룡영화상에서 떠나보내는 건 오랜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정과 같이 느껴진다"라는 데뷔 30년 차 정우성의 아쉬워하는 말과, "청룡이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그 한 가운데 김혜수가 30년을 한 자리에서 너무나 훌륭한 센스로 진행을 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0년 긴 세월 정말 수고하셨다"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병헌의 감사함, "저에게 영원한 '미스김' 김혜수 선배님. 10년 전에 선배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제가 배우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너무너무 수고하셨다"는 영화 '잠'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정유미의 울먹거리는 말까지. 중간중간 화면에 잡힌 김혜수의 표정은 후련하기도 혹은 시원섭섭하기도 한 느낌이었다.
1963년 시작된 청룡영화상이 (1976년부터 1989년까지 시상식이 중단된 바 있다)가 제44회를 맞이하기까지 그 위상이 올라간 이유는 모든 영화인들이 인정하듯, 배우 김혜수라는 반짝이는 등대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 김혜수는 청룡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그녀가 만들어낸 반짝이는 순간들을 되짚어본다.
◆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
남자 MC 배우 이덕화와 처음 등장한 앳된 얼굴의 김혜수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한 김혜수는 1993년 자신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긴 작품을 시작하게 된다.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에 배우 이덕화와 나란히 진행자로 등장한 김혜수. 반짝이는 금박이 수놓인 오프숄더 드레스와 화려한 목걸이를 하고 나타난 김혜수는 애써 긴장한 기색을 감추고 차분하게 진행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녀는 "반갑습니다. 김혜수입니다"라며 말문을 열었고, 이덕화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위하여"라고 덧붙였고, 김혜수는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위하여"라고 명랑한 목소리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갔다.
당시, 청룡영화상의 경향을 보았을 때 김혜수가 착용한 드레스는 파격 그 자체였다. 노출은커녕 한복이나 단정한 복장을 입고 나왔던 다른 여성 진행자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1993년 12월 16일 제14회 청룡영화상의 다음 날에는 김혜수의 파격 패션에 "지난 16일, 청룡영화제에서 진행을 맡은 여자 탤런트의 의상 노출이 심했다는 지적이 모두 99건이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혜수는 제14회 청룡영화상에서 자신만의 독보적이면서도 신선한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명세 감독의 영화 '첫사랑'에서 극장과 다방을 드나드는 것을 만족하는 지방 대학의 미대생 영신 역을 맡아 청룡영화상에서 최연소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기도 했다.
◆ '30년'의 무게감이 지킨 영화제의 권위, 청룡의 매력이자 청룡의 여인 김혜수
"한국 영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청룡 영화상의 매력이라면 일단, 김혜수 씨가 있고요" - 제34회 청룡영화상 中 진행자 유준상의 말2013년 제34회 청룡영화상 남자 진행자 배우 유준상의 말처럼, 김혜수는 청룡의 매력 그 자체다. 남자 진행자가 9번 바뀔 동안 김혜수만큼은 뚝심 있게 매년 시청자들을 만났다. '3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다.
1993년~1994년에는 이덕화가, 1995년과 1997년에는 박중훈, 1996년과 1998년~2000년까지는 문성근, 2001년에는 이병헌, 2002~2008년에는 정준호, 2009~2011년에는 이범수, 2012년~2016년에는 유준상, 2017년에는 이선균, 2019년~2023년까지는 유연석이 진행자를 맡은 바 있다. (1998년 한 해만 문성근과 김혜수 대신 심혜진이 청룡영화상 진행자를 맡았다)
2015년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진행자 유준상은 22번째 '청룡의 여인'이 된 김혜수에게 물었다. "제일 처음 파트너 기억하시냐?"라고. 김혜수는 "그럼요. 기억하죠. 제가 처음 진행을 맡았을 때는 이덕화 선배님께서 정말 잘 이끌어주셨고요.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왔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 이후에 박중훈 씨, 문성근 선배님, 또 정준호 씨가 오랜 기간 저랑 함께 해주셨고요. 이범수 씨도 굉장히 잘해주셨고요. 아! 이병헌 씨도 있네요. 그리고 지금 제 옆에 계시는 파트너 유준상 씨까지. 한 분 한 분 되짚어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좀 오래 했죠"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 재치 넘치는 입담과 분위기를 풀어주는 센스 지닌 김혜수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만큼,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많은 청룡영화제에서 김혜수는 그간 쌓아온 재치와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는 부드러운 면모로 아찔한 순간들마저 무사히 넘겼다.
2010년 제31회 청룡영화상에서 영화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감독 박신우)로 인기스타상을 받은 손예진이 자신이 상을 받은 것에 놀라며 횡설수설하며 "영화를 이번에, 올해 못 찍었거든요? 근데 왜 주셨지?"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들은 김혜수는 침착하게 "올해 촬영은 안 했지만, 개봉한 영화는 있죠? 워낙 많은 작품을 하시고 올 초에 개봉한 영화는 지난해에 촬영이 종료되기 때문에, 이게 올해 작품인가 과거의 작품인가 혼동될 때가 있거든요"라며 당황한 손예진에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손예진도 그제야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2022년 제43회 청룡영화상에서도 김혜수의 배려는 빛을 발했다. 여우주연상 시상자로 작년 수상자 문소리와 배우 하정우가 나왔다. 이때, 문소리는 "작년에 미처 못했던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 해도 괜찮을까요? 늘 무거운 옷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나와 일해준 00. 10월 29일에 숨 못 쉬고 하늘나라로 간 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이런 자리에서 네 이름 한번 못 불러준 게 마음이 아팠다"라며 '이태원 참사'로 인해 세상을 떠난 스태프에게 조심스레 마음을 전했다. 이에 장내가 다소 숙연해지자, 문소리는 "오늘 너무 기쁜 날인데 무겁게 만들어서 죄송하다"라고 말했고, 진행자 김혜수는 "기쁜 날이지만 의미를 함께 나누는 날이기도 합니다. 괜찮습니다. 문소리 씨"라고 분위기를 풀어주기도 했다.
◆ 영화인들을 향해 김혜수가 전한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미담을 보유한 김혜수답게, 그녀의 따스한 마음씨는 후배들이 상을 받는 순간에도 드러났다. 2014년 제35회 청룡영화상에서 영화 '한공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천우희는 눈물을 흘리며 진심 어린 수상 소감을 밝혔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얼떨떨해하던 천우희는 무대에 올라 "작은 영화에 유명하지 않은 내가 이렇게 큰 상을 받다니. 내게 이 상을 주신 건 포기하지 말라는 뜻인 듯싶다. 앞으로도 배우 하면서 의심하지 않고 정말 자신감 갖고 열심히 하겠다. 앞으로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관심과 가능성이 더 열렸으면 좋겠다. 좋은 연기 보여 드리겠다"라며 눈물을 쏟아냈고, 이를 보던 김혜수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며 "'한공주' 천우희 씨 정말 잘했습니다. 실력으로 무장한 배우입니다"라고 칭찬했다.
2015년 제36회 청룡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정현의 수상 소감 순간에도 김혜수의 공감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예상치 못한 호명에 놀란 이정현에게 김혜수는 "이정현 씨는 어릴 때부터지요? 작은 몸에서 놀라운 폭발력을 지닌 정말 무서운 연기자입니다. 오늘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무대 위로 올라온 이정현은 "전혀 수상 생각을 못 했다. 너무 작은 영화라. 정말 너무 감사드린다. 96년도에 '꽃잎'으로 오고 20년 만에 청룡 와서 즐기다 가려고 했었다. 이것을 기회로 다양성 영화들이 더욱 사랑받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중에서도 2022년 제43회 청룡영화상의 모든 시상이 끝나고, 김혜수는 "올해 한국 영화는 여러분과 다시 만나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이 계속 우리 영화와 함께하고 사랑해주신다면, 한국 영화는 때로는 '불도저에 탄 소녀'의 혜영처럼 강렬하게, '헌트'의 정도처럼 소신있게, '범죄도시'의 마석도처럼 통쾌하게, '헤어질 결심'의 서래처럼 꼿꼿하게. 각자의 삶 속에 담긴 수많은 모습으로 항상 여러분들 곁에 함께 있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모든 이들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1993년부터 2023년까지, '청룡의 여인' 김혜수는 우리에게 웃음과 울음을 함께 전한 진정한 영화인이었다. 비록 앞으로는 청룡영화상의 진행자로서 김혜수를 만날 수 없어 아쉽지만, 항상 같은 자리를 지켜온 그간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내는 바다. 30여년 동안, 김혜수의 빛나는 순간들은 더 많으나, 이 정도로 압축할 수밖에 없는 것에 아쉬울 따름이다.
아디오스! 우리들의 영원한 '청룡의 여인', 김혜수. 앞으로도 그녀가 멋진 작품으로 청룡 무대 위에 오르기를 팬들은 고대하고 있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