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의 마술사'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미국에서 지난달 21일 개봉 이후, 6억 5,000만 달러를 넘어서며 10억 달러를 향해 가고 있다. 영진위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18일 기준 누적관객수 81만 8,765명을 달성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천재 과학자의 핵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작품으로, 실존 인물인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다. 배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이외에도 조쉬 하트넷, 데인 드한, 라미 말렉, 케네스 브래너 등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그중에서도 세상을 바꾼 천재 과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와 미국 원자력 위원회 창립 위원인 ‘루이스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 남우조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북미 개봉 직후, “킬리언 머피의 연기가 영화를 지배한다”, “영화를 이끄는 킬리언 머피의 다채로운 연기” 등의 호평이 쏟아져 노미네이트의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배우 킬리언 머피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지명된 것은 처음이다. 이전까지 영화 '디스코 피그'(2001)을 통해 2002년 오렌세 독립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 '플루토에서 아침을'(2007)을 통해 2006년 유러피안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수상, '다크나이트'(2008)를 통해 2008년 서킷 커뮤니티 어워드 최고의 출연진 앙상블 상을 받기도 했다. 이어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를 통해 다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이력을 거뒀다.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경우, 영화 '채플린'(1993)의 제46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과 영화 '아이언 맨'(2009) 제35회 새턴상 최우수 남우주연상, '아이언맨3'(2014)로 제40회 새턴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다만, 아카데미에서는 수상한 이력이 없는데 영화 '채플린'(1992)에서 찰리 채플린을 연기하며 1993년에 미국 아카데미상에 처음으로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후 영화 '트로픽 썬더'(2008)에서 미국계 아프리카인 병사 역을 맡아 2009년 미국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6번 지명 만에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로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이번 수상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예측된다.
'오펜하이머'에서 킬리언 머피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협력과 대립하는 구도로 형성돼있다. 1959년 상무장관 지명이 걸린 상원 청문회와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1954년 비공식 청문회가 교차로 오간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초반에 서로를 존경하고 의지하던 모습에서 비난하고 업씬여기는 태도를 통해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을 보여준다.
킬리언 머피는 계속된 심문에 지쳐 점차 생기를 잃어가면서도 담담하게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트라우마를 겪는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불신의 씨앗이 점차 커지면서 오펜하이머를 믿지 못하는 몰입감 있는 연기와 무엇보다도 검은 속내를 감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태도로 청문회에 임하는 연기가 압권이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계속해서 무게중심을 맞추는 것처럼 불신과 불만을 토해는 킬리언 머피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연기가 지닌 균형감은 '오펜하이머'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아카데미 후보 지명 유력은 주목해볼 만한 포인트다.
▲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23.03.13)
남우주연상 영화 '더 웨일' 브렌든 프레이저
남우조연상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키 호이 콴최근 5년간,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과 조연상을 준 사례를 살펴보면 이렇다. 작년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는 영화 '더 웨일'의 브렌든 프레이저로 거구의 몸을 지니고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우조연상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배우 키 호이 콴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에에올'의 양자경과 함께 기쁨을 누렸다.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은 세무 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의 이혼 요구와 삐딱하게 구는 딸로 인해 대혼란 빠지는 이야기를 담은 '에에올'에서 키 호이 콴은 철없지만 다정한 남편으로 극의 활력을 더한 바 있다.
▲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22.03.27)
남우주연상 영화 '킹 리차드' 윌 스미스
남우조연상 '코다' 트로이 코처
2022년 진행된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은 영화 '킹 리차드'에 출연한 배우 윌 스미스가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킹 리차드'는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와 비너스 윌리엄스 자매를 훈련 시켰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윌 스미스는 두 자매를 훈련하는 혹독한 면모와 다정함을 동시에 표현하며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남우조연상은 영화 '코다'의 배우 트로이 코처가 수상했다. 당시, 시상자였던 배우 윤여정은 청각장애를 지닌 트로이 코처에게 수어로 시상하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코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가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21. 04. 25)
남우주연상 영화 '더 파더' 안소니 홉킨스
남우조연상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다니엘 칼루야
2021년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영화 '더 파더'의 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더 파더'는 치매가 걸린, 기억을 잃어버리는 자의 시점으로 전개되면서 그간의 치매를 다룬 영화들과는 많은 차별점을 뒀다. 안소니 홉킨스는 '더 파더'에서 기억을 잃는 노인을 연기하면서 자꾸만 사라지면서 누군가 위협하는 것과 같은 공포를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남우조연상은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배우 다니엘 칼루야가 수상했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가 미국 내 반체제적인 정치 세력을 감시하고 와해시키는데 파괴자 정보활동을 설립하고 급부상하는 흑인 민권 지도자들을 ‘블랙 메시아’로 규정해 무력화시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미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의 선택을 사실감 있게 표현해낸 작품이다.
▲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20.02.09)
남우주연상 영화 '조커' 호아킨 피닉스
남우조연상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브래드 피트
2020년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영화 '조커'의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동안 조커 캐릭터는 다양한 작품에서 변주되어온 바 있는데, 호아킨 피닉스는 세상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를 잠재하고 있다가 토해내는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조커'는 계단에서 춤을 추면서 내려오는 장면이 가히 압권이다.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조커가 그 순간만큼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걸어가는 동작은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남우조연상은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배우 브래드 피트가 받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으로 1969년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와 샤론 테이트 부부의 비극적인 실화에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가상의 인물들을 투입해 만들어낸 작품으로 브래드 피트는 클리프 부스 역을 맡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환상의 케미를 보여줬다.
▲ 제9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19.02.24)
남우주연상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라미 말렉
남우조연상 영화 '그린북' 마허샬라 알리
2019년 제9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배우 라미 말렉이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밴드 '퀸'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라미 말렉은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했다. 실존 인물 프레디 머큐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며, 그 시대로 빠져드는 것 같은 연기를 펼쳤다.
남우조연상은 영화 '그린북'의 배우 마허샬라 알리가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린북'은 1962년 미국을 배경으로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운전기사를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흑인과 백인의 이념적 갈등을 넘어 진실한 우정을 교류하는 로드무비 형태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흔히 오스카(Oscars)라고 불리며, 1929년 5월 16일에 할리우드 루즈벨트 호텔에서 처음 열렸다. 후보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그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미국 내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다. 후보 선정 과정도 매우 복잡한데, 출품작에 관한 투표를 여러 차례 받아 진행되는 형식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현재 미국에서 많은 관객 수를 모으며 상영하고 있는 만큼, 킬리언 머피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후보 물망은 크게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아카데미가 전통적으로 전기 영화를 선호하고 시대의 변화에 맞는 작품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기에 '오펜하이머'의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다. 국내에서도 '오펜하이머'의 열풍이 불고 있는 상황. 2024년 개최되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가 되는 바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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