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 수양은 웃었다. 무수한 사람들을 베고 천하를 얻은 대신 사랑하는 딸 세령(문채원)과 반목했던 서릿발 같은 세도가, 혹은 철혈 군주 세조는 비록 눈 먼 낭군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고 돌아섰다. KBS 가 묘한 여운을 남기는 해피엔딩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아비, 수양대군을 연기한 배우 김영철의 눈빛 덕분이었을 것이다.올해로 연기 경력 38년, KBS 의 광기 어린 궁예, KBS 의 미스터리한 백산, 영화 의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 SBS 의 자상한 아버지 양병태 등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남겨 왔지만 그에게도 혹독한 신인 시절은 있었다.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도 칭찬받기는커녕 구박당하기 일쑤라 “밤 촬영할 때 달을 보며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나는 연기를 하면서부터 사람이 됐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선배들을 연기자로서 존경했고 배울 게 많았으니까 참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김영철은 이제 현장에서 후배들이 불편해 할까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기도 하는 세심한 가장 같은 선배가 되었다.그래서 자신의 연기 인생에 대해서도 거창한 수식 대신 “배우가 좋았고, 이게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공부도 못했지, 싸움을 시라소니같이 잘 한 것도,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니니 그저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남들이 대본 열 번 볼 때 나는 열 한 번 본 정도의 작은 차이일 뿐”이라 덤덤하게 털어놓는 김영철은 나이들 수록 무게감이 더해지는 배우다. 그리고 희끗하게 센 머리카락에도 여전한 결기와 혈기가 느껴지는 그가, 자신이 젊었을 때 즐겨 들었던 음악들을 추천했다.
1. Eagles의
김영철이 주저 없이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를 고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 베스트 10’과 같은 설문조사에서 십 수 년 째 부동의 상위권을 차지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Hotel California’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사실 뚜렷한 메시지나 인상적인 후렴구보다도 곡 자체의 중독적인 분위기나 각자가 다르게 갖는 이미지야말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심지어 대를 이어 이 곡을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70년대 초반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록밴드 이글스는 그래미상을 여섯 차례 수상했고 전 세계적으로 1억 2천만 장의 앨범을 판매했으며 올 3월 첫 번째 내한공연으로 수십 년을 기다려 온 국내 팬들과 만났다.
2. Leonard Cohen의
레너드 코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일지라도 느릿한 전주와 함께 ‘If You Want A Lover, I`ll Do Anything You Ask Me To’라는 가사를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귀에 익을 것이다. 김영철이 추천한 두 번째 앨범, 레너드 코헨의 의 타이틀곡 ‘I`m Your Man’은 앨범이 발표되었던 8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는 물론 국내에서도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에서 냉철하지만 사랑 앞에 이성을 잃는 조직 보스를, MBC 에서 외로운 중년 남성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김영철과 이 로맨틱하다 못해 맹목적인 애정을 그린 노래가 특히 잘 어울린다는 점도 흥미롭다.
3. 한대수의
최근 한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한대수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말했다. “웃고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자꾸 행복의 나라, 기쁨, 사랑, 평화를 찾는 거라고.” 그 시절 미국 유학까지 갔을 만큼 엘리트였던 핵물리학자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며 시작된 험난한 개인사, 그리고 엄혹했던 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음악으로 숨 쉬고자 했던 그가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처럼 시대를 앞서 간 곡들을 만들어낸 것은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삶과 싸워왔는지를 보여준다. ‘물 좀 주소’가 발표되었던 70년대 중반, 스물 두 살의 청년이었던 김영철이 이 피 끓는 한대수의 음악들을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4. Bob Dylan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가운데 한 사람, 살아 있는 전설, 시대의 아이콘 등 밥 딜런에 대한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를 가장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밥 딜런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1973년 발표된, 그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Knockin` On Heaven`s Door’ 역시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김영철을 비롯한 전 세계의 청년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먹고 살기 위해 연기를 했지만 “일을 위해 남에게 아부한 적도, 잘 봐달라고 돈 갖다 준 적도 없다. 보통은 저 위로 올라가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을 속이지 않고 자존심 버리지 않고 뒤돌아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는 그의 말에서도 여전히 청년의 기운이 느껴진다.
5. 김현식의
“보통 사람이 50년을 살면 계속 사는 거지만 배우는 다른 인물로 1년, 또 다른 인물로 1년씩 찢어져 사니까 자기 인생을 그만큼 살지 못한다. 외국에 이민 간 친구들을 보면 30년 전에 간 사람들은 30년 전 감성을, 5년 전에 간 사람들은 5년 전의 감성을 갖고 산다. 그런 느낌이다. 배우를 시작한 시점부터 해서 어느 날 보니까 내 나이가 60이 다 됐다. 나는 지금도 서른 살 같은데”라는 김영철의 말대로 사람의 감성은 어느 시점에 멈추기도, 어느 순간 과거로 잠시 회귀하기도 한다. 故 김현식이 1986년 발표한 3집 앨범 역시 듣는 이를 25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음악이다. 타이틀곡 ‘비처럼 음악처럼’을 비롯해 앨범 자체의 완성도는 물론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 박성식(키보드), 장기호(베이스), 그리고 앨범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故 유재하가 키보드를 쳤다는 사실 또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다.
평생 연기를 업으로 삼고 살아온 김영철에게도 물론 고비는 있었다. “이걸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을 다 끌고 갈 수 있을까. 그런데 결국 답은 하나다. 가보자, 대신 자존심을 잃고 가면 안 된다. 자존심이 결국에는 의지가 되고 자기 확신이 되기 때문이다. 3, 4년 동안 일이 하나도 없어서 놀 때가 있었는데 후배들한테 그랬다. ‘잘 나갈 때 멋있는 건 당연해. 못 나갈 때 멋있어야지’ 하하.” 그래서 인생에 더 이상의 어떤 욕심도 없이 “남자가 이 나이가 되면 명예다. 명예라는 거창한 말보단 내 이름 더럽히지 않고 가져가고 싶은 정도다. 돈은, 남한테 빌리지 않고 자식들 가르칠 수 있을 정도면 됐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더라”고 말하는 이 남자, 여전히 멋있다.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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