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의 ‘감옥 부수기’는 감옥을 나온 순간부터 힘을 잃었고, 세상을 구할 것 같던 히어로들은 창조주들의 파업과 함께 길을 잃고 헤맸으며, 길반장은 떠났고, 성공적인 데뷔를 한 전사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 등의 인기와 함께 마니아층을 넘어 대중적 관심을 받은 ‘미드’는 몇몇 장수 시리즈에 대한 꾸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렇게 ‘핫’한 콘텐츠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 , 처럼 ‘미드’이기에 가능해 보이는 시리즈는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조지 R. R. 마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작 은 간만에 만나는 ‘미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원작의 탄탄한 세계관을 HBO 특유의 규모로 완성한 이 드라마는 한국에선 아직 보기 어려운 무엇에 가깝다. 요컨대 갈증을 느끼던 ‘미드’ 팬들은 간만에 열의를 불태울 대상을 만난 셈이다. 그 열의가 좀 더 하얗게 불태워질 수 있도록 가 이 흥미로운 작품의 매력을 분석하고, 주연 배우들과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또한 이를 통해 잠시 끊었던 ‘미드’에 대한 의욕이 생긴 독자들을 위해 과 다양한 키워드를 공유하는 최신 ‘미드’들 역시 추천한다.

의 아성을 무너뜨릴 단 하나의 판타지. 케이블 채널 SCREEN을 통해 방영되는 미드 의 홍보 캐치프레이즈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거짓말이다. 용과 마법, 장벽 밖 공포의 존재 아더 등이 혼재하고, 가상의 가문들 내력 하나하나까지 촘촘하게 설계한 세계관이 환상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면 단언할 수 있다. 환상적이다. 왕자와 결혼해 “금발 아이를 낳겠다”는 스타크의 딸 산사의 말에서 왕자의 핏줄을 연역해내는 진행처럼, 사소해 보이던 복선 하나까지도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속 날줄과 씨줄로 엮어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그럼에도 장르적 특성만으로 이 작품을 판타지라 쉽게 말할 수 없는 건, 권력을 향한 여러 인물들의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많은 정치적 방법론들이 지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영웅이 온갖 협잡꾼들을 처단하고 정의를 세우는 판타지는 마지막 회에서 가장 영웅적 인물이었던 에다드 스타크가 불명예스런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는 순간, 이미 무너졌다. 제 아무리 같은 회에서 대너리스가 부화시킨 용 세 마리가 등장했다 하더라도.

드라마로 현현한 마키아벨리의

그래서 조지 R. R. 마틴의 원작 소설 1부 제목이자 드라마의 제목인 은 작품의 핵심을 찌른다. 만약 단 하나의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수 천 개의 검을 녹여 만들었다는 철의 왕좌다. 의 절대반지가 그러하듯 왕좌는 모든 이들이 욕망하는 대상이다. 현재의 왕 로버트는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미친 왕’ 아에리스 2세와의 전쟁을 벌였고, 그의 형제들 역시 같은 자리를 노리며, 왕비 세르세이는 자신과 동생 자이메 사이에서 태어난 조프리를 왕위에 세우기 위해 에다드를 반역자로 몬다. 물론 에다드처럼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왕좌에 초연한 자도 있다. 하지만 세르세이의 말대로 “왕좌의 게임에는 승리 혹은 죽음 뿐”이다. 중립은 불가능하다. 경박함 속에 선의와 현명함이 있다고 믿었던 바엘리시는 에다드를 배신하고, 쉽게 그 속을 알 수 없는 바리스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승리자의 옆에 붙는다. 북유럽 신화 속 베오울프나 기사 문학에 등장하는 사자왕 리처드 같은, 혹은 이나 등의 판타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영웅왕 이야기는 여기에 없다. 오히려 닮은 것이 있다면 마키아벨리의 에 소개되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로마 군주들의 목록이다. 새 왕조를 연 로버트가 처가이자 자금줄인 라니스터 가문과의 알력을 비롯해 신생 군주로서 겪는 어려움은 ‘새로 형성된 군주국이야말로 정말로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한다. 군주국을 확장, 병합하면서 피해를 입힌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당신으로 하여금 통치자가 되도록 지원한 사람들을 애초에 그들이 기대한 만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지적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왕좌를 차지한 영웅에겐 무엇이 가능한가.

답보다 더 통렬한 질문이 왕좌를 가리키다

“전쟁 중에 죽는 사람이 똥을 지리는 건 노래(영웅담)에 넣지 않는다”는 로버트의 말처럼, 은 기사 문학에서 낭만은 빼고 현실을 집어넣은 봉건 시대의 재현에 가깝다. 중세에 왕 밑에 영주가, 영주 밑에 기사가 존재한 건, 왕의 절대 통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현실적 문제다. 일곱 개의 왕국을 다스려야 하는 왕좌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다. 은 그 통치 공학에 집중한다. 왕좌의 위엄을 세우려면 영주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다. “세금을 두 배로 올리고 만 명의 남자로 왕의 군대를 만들겠다”는 조프리의 계획은 그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에리스 2세의 후손인 대너리스를 암살하라는 로버트에게 “평생 불명예를 안고 살” 거라 말하는 에다드의 지적처럼 명예와 덕을 잃은 군주 역시 영주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된다. 에다드와 로버트가 몰아냈던 그 ‘미친 왕’처럼.

이 딜레마 속에서 적어도 첫 시즌을 마친 은 답을 주지 않는다. 통치 공학을 분석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봉합할 통치 철학을 제시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고, 그것이 판타지라는 장르의 문법에 유의미한 균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정통성을 부여받은 속 아라곤은 승리와 함께 ‘왕의 귀환’을 이룰 수 있었지만 왕좌가 모두를 향해 열린 에서 보장받은 자리는 없다. 성품은 타고나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비어있는 왕좌처럼 자신 바깥에 존재하는 욕망의 대상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 역시 만들어진다. 그 안에서 타고난 영웅은 없으며 사우론 같은 절대악 역시 없다. 전쟁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신념 대 신념 혹은 욕망 대 욕망의 대결이 되며, 좋은 통치는 선하고 영웅적인 주인공에 의해서가 아닌 다양한 정치 논리의 고려를 통해 가능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의 아성을 무너뜨릴 판타지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작품이 의 아성을 무너뜨린다면 판타지 너머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스타크 가의 가언을 빌린다면 이 장르에 ‘겨울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봄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게 하는 그런 겨울을 우리는 맞이하고 있다.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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