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남자배우라면 누구나 영화 의 한철민이라는 캐릭터를 탐내지 않았을까. 장혁이 연기한 한철민은 절대적인 등장 분량과 상관없이 영화 전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고, 그에 대한 묘사는 모두 스포일러로 이어질 만큼 이야기의 반전 그 자체다. 살인 용의자인 그가 진범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는 영화에서 측은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오싹함을 주는 한철민의 기운은 사진 촬영에서도 재현되었다. 카메라를 노려보는 장혁에게서 언뜻 언뜻 한철민의 얼굴이 스치면서 주변의 온도는 5도쯤 더 낮아졌고, 잘생긴 남자배우의 얼굴은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짧은 순간에도 순식간에 다시 한철민으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몰입했던 에서부터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SBS 까지, 그와 나눴던 대화를 7개의 키워드와 7장의 사진으로 옮겼다.



KBS 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곽정환 감독은 장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말 그대로 이대길은 장혁이었고, 장혁이 대길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알고 사고한다고 생각했다.” 장혁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한 전제조건은 작품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연기론의 첫 운을 떼었다. 달변가가 아님에도 연기에 대한 원칙이나 경험에 대해 말할 때 장혁은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들어가며 꼼꼼하게 설명했다. 자신만의 연기론이 굳건하게 성립된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임에도 그의 연기론은 아직도 보수 중이라고 한다. “아직 정립된 건 아니고 계속 문법을 만들어 가는 거죠. 어떤 부분에서 정확하다고 생각한 것도 다른 사람과 연기하면서 깨지는 경우도 있고, 그럴 때는 보수를 해나가죠. 다만 조금씩 더 다져간다는 생각은 들어요. 예전에는 아예 백지 한 장이었는데 지금은 스케치북 같아요. 작품 하나를 하면 백지에다가 그림을 그리는데 작품이 끝나면 또 다시 백지예요. 그래서 한 장 더 넘겨서 다른 주제로 그리고. 그래서 매번 작품 할 때마다 그만큼 설레고 긴장돼요. 그렇게 계속 스케치북을 채우면서 갈 것 같아요.”



에서 장혁은 거의 대부분의 신에서 하정우와 함께 한다. 그러나 살인 용의자인 한철민과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 강성희는 캐릭터 자체의 느낌도, 이들을 연기하는 두 배우의 방식도 극과 극이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한철민은 자신이 가진 패를 하나도 내놓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쫙 펼쳐놓고 닫힌 한철민의 틈을 파고드는 강성희와 매순간 부딪친다.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30대 남자배우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두 사람은 “신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열어” 두었다. “무조건 10이에요. 11도 안 되고 9도 안 돼요. 상대방이 8을 던졌으면 난 2를, 6을 던졌으면 4만큼만 받아쳐야 해요. 그래야지 10이라는 잘 만들어진 앙상블이 나오죠. 그런데 내가 던져야 하는 순간 그 분포도가 매번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리듬감을 잘 맞춰야하고 미리 커뮤니케이션을 잘 해놓아야 해요. 우리가 아무리 연기를 한다고 해도 ‘내가 이렇게 던질 테니 넌 이렇게 받아’ 이럴 수는 없거든요. 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토대에 대한 논리를 정해놓고 서로가 감성적으로 열려있는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여야죠. 무조건 본능만 내세울 수는 없어요. 본능적으로 ‘어, 하정우야? 던졌어? 나 장혁이야!’ 이럴 수는 없단 거죠. (웃음)”


1997년 SBS 로 데뷔한 장혁은 벌써 14년째 연기를 하고 있다. 외모로 먼저 주목을 받았던 청춘스타에서 한 작품을 책임지는 무게감을 가진 배우가 되기까지, 장혁은 명확한 목표나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달려온 건 아니다. 처음 연예계에 왔을 때는 “나 이거 왜 하고 있지?”라고 스스로 의문을 가질 만큼 배우를 꿈꾸지 않았던 그의 원래 장래희망은 선생님이었다. “아버지께서 건설 쪽 일을 하셔서 현장이 움직일 때마다 생활 패턴이 달라졌어요. 그러다보니까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면 6시에 퇴근하고 방학 때는 집에 있을 수 있고 자기 일상에서 움직일 수 있으니까 되게 하고 싶었어요. 또 저는 사람들이랑 관심 있는 주제를 가지고 얘기하는 걸 좋아해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게 있다 보니 선생님이 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장혁은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TV 출연도 굉장히 드물고 사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신비주의’라는 포장보다 배우로서 그의 철학이 담겨있다. “스타라는 이미지에 잡아먹히는 배우는 되고 싶지 않아요. 대중들은 나와 캐릭터를 혼동해요. 제 개인적인 사생활을 모르니까요. 작품을 통해서 노출된 만들어진 모습을 보면서 그게 저라고 생각하지만 배우는 철저하게 캐릭터를 컨트롤하는 컨트롤러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내가 캐릭터를 움직여야지 캐릭터에 의해 내가 움직여지면 배우 생활이 재미없어져요. 작품에 있어서도 내가 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면 또 다른 작품에서 다른 캐릭터를 또 만들어야지 이미 만든 캐릭터로 인해 들어오는 작품을 또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그래도 14년을 배우 생활을 한 저만의 자존심이죠.”



작품을 분석하고 캐릭터를 해석해나가는 작업에 흥미를 가진 배우답게 장혁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것에도 매력을 느낀다. 배우와 감독 양 쪽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른 배우들처럼 그도 감독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일까? “배우는 선택을 받는 입장이잖아요. 의뢰를 받아서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시나리오에 나의 해석을 가지고 연기를 하지만 내가 만든 극본으로 연기한다면 내 감성이 더 자연스럽게 들어갈 것 같아요. 물론 연출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시나리오 작가에 더 끌려요. 연출만 잘 한다고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얼마나 현장을 잘 이끄는가가 중요하죠. 이를테면 지배하고 통치하는 군주인데 제 성향은 장수는 될 수 있어도 군주는 힘들어요. (웃음) 시나리오 구상은 많이 하고 있어요. 아직 글로 확실하게 옮기진 않았지만 역사의 변칙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게 재미있어요.”


의 대길에 이어 또 다시 사극 를 만들고 있는 장혁. 채윤은 대길처럼 무예가 뛰어나고 과거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장혁은 채윤과 대길은 다르다고 말한다. “채윤의 무술은 액션의 화려함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에요. 드라마 자체도 액션 사극은 아니고 수사물에 더 가까워요. 채윤은 노이로제에 걸린 캐릭터라 잠을 못자요. 대길이는 어제, 오늘, 내일이 별 작용을 안 하는 캐릭터였죠. 그냥 매일이 오늘이었어요. 눈을 떴으니까 사는 거고, 감으니까 세상이 닫히는 거고. 그런데 채윤은 어렸을 때 트라우마가 너무 강해서 잠을 못잘 정도로 노이로제가 심해요. 어제만 사는 사람이죠. 오늘과 내일이 없고 과거에 매여 있으니까.”



최근 장혁은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10년 전 앨범을 발매하고 랩퍼 TJ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친한 동생” 박재범을 돕기 위해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다. ‘말해줘’를 나직이 읊조린 후 당당하게 립싱크로 랩을 이어가던 코믹한 모습은 언제나 진지했던 장혁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이벤트였지만 장혁에겐 어땠을까? “처음부터 빵 터트리는 것보다 차분하게 가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낸 아이디어였어요. 다들 친하니까 한 번 재미있게 해보자 한 건데, 사실 처음에는 저는 초반만 하고 들어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홀로 남겨지는 수로 형이 ‘나 정말로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눈빛을 호소력 짙게 보내는 거예요. 형을 두고 내려오는 건 전쟁통에 전우를 남겨놓는 거 같아서 차마 그렇게 못하고 남았는데 준비한 게 없잖아요. 그래서 이 3분 인생에서 없다 치고 간 거죠. (웃음)” 그러나 아쉽게도 그 이후로 장혁의 무대를 다시 보긴 힘들 것 같다. 또 다시 이런 깜짝쇼를 볼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 “세상에는 한 번으로 족한 게 있습니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