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9월 29일 개봉하는 영화 의 중요 열쇠로 기능하는 ‘아이러니’라는 단어는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푸는데도 꽤 유용하게 쓰인다. 어딜 봐도 드라마틱한 구석이 없는 작고 말간 얼굴 위로 매번 기상천외한 캐릭터가 그려지는 것도 아니러니요, 눈물 쏟는 모성애를 버거워하는 여자에게서 견고한 어머니의 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리고 도통 무엇이 되겠다는 야망도 포부도 없는 배우에게서 한국 영화계가 가장 현실적인 희망을 걸게 되는 것도, 아이러니다.

어떤 반찬에도 간을 맞추는 하얀 쌀밥 같은 얼굴

특별한 색도 향도 느껴지지 않은 전도연의 얼굴은 매번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우리를 찾아오곤 했다. 의 바람 난 아내에게서는 어린 동생을 업고 고무줄 놀이를 하는 의 홍연이는 없다. 눈 아래 깊게 패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의 수진이도 마찬가지였다. 정지우 감독은 전도연의 소녀 같은 몸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여성을 발견해 내고, 류승완 감독은 그 순한 얼굴에서 날아오는 맥주병에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 독한 기운을 불러냈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열일곱 시골 소녀에서 주인을 유혹하는 하녀로, 불륜의 늪에 빠진 유부녀에서 돈 가방을 노리는 건달의 여자로,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는 다방 아가씨에서 사랑 따윈 필요 없는 능수능란한 사기꾼으로, 전도연의 얼굴은 어떤 역할이든 감당해 낸다. 제 아무리 맵고 짜고 달고 신 반찬이 올려 진다 해도 기가 막히게 간을 맞추는 그 하얀 쌀밥 같은 얼굴로.

점점 지옥을 향해 추락해 가는 삶. 오후의 볕이 내리쬐는 집안 마당에 앉은 여자는 조용히 머리를 자른다. 이제 믿을 남편도, 아들도, 하나님도, 어쩌면 자기 자신마저 증발해 버린 세상 앞에서 비로소 무덤덤해진 여자. 이 비추는 신애의 마지막 모습은 아이러니 하게도 삶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긍정을 이끌어 낸다. 발화되기도 전에 소화된 의 미숙한 모성도 마찬가지다. 딸에게 “언니라고 불러”라고 요구하는 철없는 여자,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을 안 했던 건지, 몰라서 못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17년 전 어린 나이에 사고처럼 낳은 딸을 품지도 내치지도 못하던 그 여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는다. 그것을 모성이라 부르건 업보라 부르건 의리라고 부르건 간에, 세상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내놓은 여자는 모성의 본능을 뛰어넘는 인간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여윈 몸을 내던진다. 대중성과 실험성, 파격과 절제, 소녀와 여인

전도연은 사실 꿈이 없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가 되겠다는 꿈도, 전 국민의 가슴에 남는 일생일대의 연기를 해보겠다는 꿈도, 여기저기 상을 다 휩쓸고 다니고 싶다는 꿈도 없다. 그냥 내일을 위한 꿈을 꿀 시간에, 이 순간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미래가 아닌 현재, 남이 아닌 자기 자신과 가장 열정적인 연애에 빠져있을 뿐이다. “어릴 땐 평생 이 일을 하겠다든지, 배우로서의 뚜렷한 자의식도 없었어요. 그냥 내 얼굴이 TV에 나오는 게 좋았죠.” 베이비로션 광고 모델 때부터 남달랐던 맑고 깨끗한 피부 덕에 전도연은 여전히 생기 있는 ‘젊은 여자’로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벌써 데뷔 20년이 훌쩍 넘은 ‘원로 배우’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그녀의 대표작을 쭉 나열하다 보면 꽤 흥미로운 그래프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에서 으로 에서 으로 에서 드라마 로 에서 로 에서 드라마 으로, 에서 으로, 에서 으로, 전도연은 대중성과 실험성, 파격과 절제, 소녀와 여인, 흥행과 예술의 트랙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점점 자신만의 지름을 넓히고 높이를 올려갔다.

심은하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떠나가고, 이영애가 교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는 배우로서, 흥행과 시청률의 여왕으로서, 2007년에는 칸 영화제를 통해 합당한 권위까지 얻으며, 배우 전도연은 충무로에 자신만의 유일한 존재감을 확보했다. 애당초 그녀의 꿈이 무엇이었던 간에 한 시대의 영화 시장은 전도연으로 인해 다음 꿈을 꿀 수 있게 된 셈이다. 인과응보를 배반하는 아이러니의 현신. 전도연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배우다.

글. 백은하 기자 on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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