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권상우는 ‘실장님’보다 밑바닥 인생이나 거친 반항아가 어울린다. 의 말썽꾸러기 고등학생 지훈이나 대한민국 학교에 가운뎃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우던 의 현수가 권상우를 대표하는 얼굴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권상우가 영화 의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하겠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권상우가 연기한 의 남순은 철저히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자신의 실수로 가족을 잃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스스로를 해치고 또 해친다. 권상우의 공허한 눈빛과 멍한 표정은 심리적 통증으로 인해 육체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순을 살아 숨쉬게 만들었다. “이 내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권상우의 호언은 설득력이 있다. 권상우가 , 그리고 연기, 가정생활, 사업 등 삶의 전반에 대한 자신감을 담아 이야기했다.

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권상우 : 남순은 자신의 실수로 가족이 죽게 되고 자기 눈앞에서 죽어가는 누나를 살릴 수 없었다는 자책감과 그 때의 충격으로 무통각증을 갖게 됐다. 누나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서 통증도 감각도 못 느낀 채 가족과 함께 살던 시점에서 멈춰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맞으면서 살다 자신과 반대 상황에 있는 동현(정려원)을 만나게 된다. 아무것도 못 느끼던 남자가 여자를 통해 통증을 느끼게 되고 여자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는 점이 좋았다. 이제는 ‘의 권상우’로 불렸으면 좋겠다. 는 오래됐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이 더 좋다.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영화에서 많이 때리거나 많이 맞는 캐릭터를 자주 연기했다.
권상우 : 영화나 캐릭터를 그렇게 접근한 적은 없다. 은 많이 맞아서라기보다 시나리오 구조가 좋았다. 2시간 안에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구조에 좋은 설정과 좋은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시나리오가 좋아서 할까 말까 고민하지도 않았다. 해외 작품 제의가 들어와서 중국 영화 출연을 계약하고 도 이야기됐을 때였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캐릭터와 장르인 것 같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서 같이 일해본 곽경택 감독은 어떤 연출자인가.
권상우 : 곽경택 감독은 인간을 영화적으로 멋지게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캐릭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뽑아낸다. 현장 컨트롤에 강단이 있다. 자신의 생각과 계산이 정확한 것 같다. 가끔 현장에서 대사를 만드는데 적재적소에 들어가는, 감칠맛 나는 대사를 생각해낸다. 대단하다. 이 감독님의 10번째 영화인데 그중 이 영화에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 있다고 했다. 영화 중후반부에 마동석 씨와 내가 차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나도 생각해보니 그 장면이 가장 괜찮은 신 같다. 영화에서 동현은 남순을 가리켜 “혀 짧은 소리를 낸다”고 타박한다. 기분 나쁘지는 않았나.
권상우 : 세트 촬영할 때 감독님이 즉석에서 대사를 만들어주며 어떠냐고 물으셨다. 재밌더라. 관객들 반응이 기대가 됐다. 사실 나는 콤플렉스가 없다. 연기하면서도 그런 점에 대한 창피함도 없었다. 나는 재미없는 멜로영화는 싫다. 이런 신들이 중간 중간 있어야 영화가 지루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즐겁게 촬영했다.

남순의 캐릭터는 어떻게 설정했나.
권상우 : 무통각증이 있는 사람을 만나서 취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표현하는 건 다큐멘터리 같은 방식인 것 같다. 어떻게 연기하든 권상우 식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무통각증을 잘 모르겠지만 멍하게 앉아 있거나 껌뻑거리는 느낌, 무심하게 움직이고 말하는 느낌을 생각할 것 같았다. 외롭고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머릿속에서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을 그리려 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너무 많지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배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연기를 제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송강호, 설경구 선배처럼 될 수 없다는 걸 나도 안다. 그러나 그분들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에게 외면받지 않는 배우,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혹시 남우주연상에 대한 욕심도 있나. 이번 작품에 대한 반응도 좋은데
권상우 : 송강호, 설경구 선배가 받을 땐 몰랐는데 작년에 원빈이 받으니 조금 욕심이 나긴 하더라 (웃음) 아들에게 인기상만 보여줄 순 없잖나 (웃음) 영화 속 남순처럼 가족을 유난히 챙기는 걸로 유명하다.
권상우 : 영화의 여러 요소 중에서는 가족에 대한 동기가 가장 세다고 생각한다. 은 가족을 잃게 된 상처를 건드리니까 마음이 아프더라. 형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나서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둘 다 애를 가진 부모 입장이 되면서 가까워졌다. 어머니와는 결혼 후에도 계속 같이 살고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와 형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해외 활동보다 국내에서 성공하는 게 우선이다”

해외 시장에선 액션 장르로 성공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권상우 : 영어를 잘한다 해도 동양인이 할리우드에서 멜로영화의 주인공을 할 수는 없잖나.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은 왠지 무술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게 무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미국과 유럽 시장에는 마니아 층이 있으니 성룡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목표가 있다. 성룡과 작업해본 소감은 어떤가.
권상우 : 신기했다. 성룡과 내가 모니터에 함께 나오면 걸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형도 내가 영화 에 처음 나온 걸 봤을 때보다 성룡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는 이야기에 더 기뻐했다. 어릴 때는 추석날이면 늘 성룡 영화를 보곤 했다. 내겐 큰 영광이다.

를 장백지와 촬영하기도 했다.
권상우 : 장백지와는 후반부에 친해졌다. 성격이 털털해서 남자 같다. 연기도 잘하더라. 총 두 달 이상 찍었을 텐데 나는 한 달 반 정도 찍었다. 해외에서 영화를 찍을 때는 신경이 더 많이 쓰인다. 우리나라 현장처럼 대본이 정확히 나오는 게 아니라 매번 바뀌니까. 그래서 늘 예민한 상태로 촬영에 임한다. 새롭게 도전하는 느낌이 신인 같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의 경우는 파리여서 더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케이터링이 호텔 뷔페 수준으로 나오는 데다 카메라 3대가 늘 스탠바이 하고 있는 것도 새로웠다. 를 찍었던 중국 촬영장에는 현장 편집이란 게 없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프로듀서의 힘이 더 센 것도 특이했다. 다들 베테랑 스태프라서 그런지 정말 잘 찍더라.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한다던데.
권상우 :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출연 논의 중이다. 계약이 완료되지 않아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출연이 확정되면 크레딧에 가장 먼저 오르게 된다. 해외 매니지먼트는 성룡의 회사가 맡아서 해주는데 시나리오 선별도 성룡 측이 해준다. 내년 4월까지 해외 일정이 잡혀 있다. 돌아와서는 쉬고 싶다. 가족에게 모든 걸 쏟고 싶다. “연기가 내겐 통증을 잊는 방법이다”


지금 가장 연기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권상우 : 액션에 대한 자신감도 있고 남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어서 한국판 시리즈가 있다면 해보고 싶다. 우리나라엔 그런 시리즈가 없잖나. 한국 실정에 맞게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할 수 있는 한국판 시리즈가 있다면 꼭 해보고 싶다.

연예인으로 살다 보면 대중이나 언론의 반감을 살 일도 종종 생기는데 그런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권상우 : 두렵지 않다. 자신감은 작품에서 나오는 것 같다. 좋은 작품을 했으면 자신이 있고 대중이 인정해주니 어깨를 펼 수도 있게 된다. 부족한 작품이면 기운이 빠지고 다시 주저앉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업도 하고 있다. 연기와 다른 분야의 일을 해보니 어떤가.
권상우 : 재미있다. 화장품 사업은 좋은 방향으로 잘 진행이 되고 있다. 하루아침에 사업으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많은 공부가 되고 있고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건물에 문제가 많아서 카페는 지금 문을 닫았지만 카페도 다시 부활시킬 거다.

미술을 전공했는데 재능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권상우 : 현장에서 뭔가 그리고 있는데 정려원이 보고 놀라더라. 미술을 전공한 게 내 이미지와는 잘 안 맞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긴 하다. 사진과 그림을 덧붙여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거다. 그렇지만 크로키나 데생은 최소한 미술 공부한 티를 낼 정도는 돼야 하잖나. 개인적으로는 추상화보다는 정물화처럼 구체적으로 뚜렷한 작품을 좋아한다.

배우로서 느끼는 통증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권상우 :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때일 것이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고 과거에 연연하지는 않는 편이다. 어차피 과거는 지울 수 없는 일이니 앞으로가 중요한 거다. 그래서 앞만 보고 가려고 한다. 연기 자체가 내겐 통증을 잊는 방법이다.

글. 고경석 기자 kave@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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