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대학교수로 살아가는 전직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은 친한 형이자 영화평론가인 영호(김상중)를 만나기 위해 서울 북촌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영호가 각별히 아끼는 후배 보람(송선미), 성준의 데뷔작에 출연했던 배우 중원(김의성)과 만나 밥을 먹고 북촌의 술집 ‘소설’을 찾는다. 이곳의 주인 예전(김보경)은 성준의 옛 애인 경진(김보경)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삼일 간의(혹은 세 차례 변주, 반복되는) 방문 속에서 성준과 예전은 눈길을 함께 걷고, 갑작스러운 키스를 나누고, 벅찬 하룻밤을 함께 한다.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시간의 미로여


진심인지는 몰라도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다”는 것이 애당초 성준의 각오였다. 그냥 영호 형만 만나고 “어떤 새끼도 안 만나”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라는 건 우연이라는 운석들의 낙하 속에 단박에 어지럽혀진다. “20분 동안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4명이나 마주쳤다”는 보람의 우연에 경쟁이라도 하듯 성준도 길에서 우연히 (별로 반갑지 않은) 여배우를 만나고, (성공한 후 재수 없어진) 동료 감독을 만나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뮤지션을 만나고, (묘한 기운을 가진) 팬을 만난다. 게다가 이미 얌전하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성준의 북촌방향에 결정적 암석이 등장한다. 옛 애인과 똑같이 생긴 여자, 예전이다. 그리고 예전과의 충돌을 거친 후 그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정작 홍상수는 좀처럼 방향이 없는 감독이다. 제주와 통영, 북촌과 부안이라는 행보에서 어떤 인과도 찾을 수 없다. 성장이나 발전 같은 평가 속에 재단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는 매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홍상수에게 목적지를 묻는 건 무의미하다, 그저 그 움직임의 좌표를 쫓아가는 편이 훨씬 즐거운 관람 방법일 것이다. 컬러로 촬영되었지만 최종적으로 흑백으로 선택된 의 화면은 물리적 광량과 상관없는 심정적 라이트를 수시로 켜고 끄면서 영화의 ‘밤과 낮’ 그 시간적 경계를 지워낸다. 밤길을 걷다 키스를 나누는 남녀의 모습은 마치 낮처럼 환하게 빛나고, 대낮에 홀로 북촌 길을 걷던 남자가 팬(고현정)의 카메라 렌즈 앞에 멈춰 서는 순간, 밤길 속에 등대를 만난 듯 섬광이 지나간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증명하고 싶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집요한 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라는 종족을(혹은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편견 없이 바라보기 위한 난방향의 무모한 도전에 가깝다. 매 작품이 완결이라 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요. 모든 작품이 가치를 가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시간을 흔들고 인물을 겹친 은 그 중 가장 따뜻하게 기록된 어느 겨울의 실험이다.

글. 백은하 기자 one@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