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얼굴에는 불혹을 넘긴 신중함이 서렸다. 작은 어깨를 숙여 또박또박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평범한 양복, 수수한 구두, 단정한 머리모양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남자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한 치의 어색함이 없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벽을 등지고 서 달라는 부탁에 남자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셔터 소리가 시작됨과 동시에 남자는, 허물을 벗어 던졌다. 성별과 나이, 국적을 모두 벗고 오직 켄 정이라는 희대의 캐릭터만을 입은 남자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배경음악도, 미리 협의한 콘셉트도 없었지만 카메라 앞에서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켄 정의 유쾌함에는 일초도 눈을 뗄 수 없는 에너지가 있었다. 마치 혜성처럼, 그렇게 그가 나타난 것이다.

한 장면도 낭비하지 않고 살아온 남자

어두운 하늘에 긴 꼬리를 그리는 섬광. 본 사람은 누구나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밖에 없는 빛. 켄 정의 등장은 언제나 혜성에 비할 만했다. 영화 에서 벌거벗은 그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 오르는 순간, 그 영화로 처음 큰 상을 받게 된 그가 MTV 무비 어워드에 호랑이 무늬 바디수트를 입고 등장해 춤을 추는 순간, 드라마 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중국인 세뇨르 챙이 되어 스스로를 ‘호랑이’라고 칭하는 순간은 언제나 강렬했으며 난데없었다. 그는 “의 성공 이후 미국에서 수많은 성인등급 코미디가 만들어 졌다. 그 영화는 코미디의 혁명을 불러온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어떤 영화도 를 뛰어 넘지 못했고 조연에 불과했던 켄 정이 스타로 부각된 것 이상의 혁명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은 켄 정이 빌보드 뮤직 어워드의 진행을 맡거나 블록버스터 에 출연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유난히 작은 동양 남자가 거대한 미국 연예계에서 해내기에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그러나 켄 정이 정말로 큰 인상을 남기는 지점은 그가 번쩍하고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광기에 가까운 유머감각이 암전되듯 잠잠해 지는 순간에 있다. 마치 스위치가 꺼지듯, 인터뷰가 시작되자 켄 정은 더 할 나위 없이 점잖고 다정한 사람으로 변했다. “본능적인 부분과 장기간 를 찍으며 트레이닝 된 부분이 합쳐진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그 전환 능력은 자연스럽게 눈앞의 켄 정에게 세월과 인생을 다시 덧입혀 준다. 그리고 이 남자가 카메라 앞에서 같은 포즈를 한 번도 취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단 한 장면도 낭비하지 않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만든다. “코미디는 부업으로 진행하는 일종의 취미였다”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속도로 코미디의 세계에 도착한 이 혜성은 사실, 우주로부터 온 얼음과 먼지 덩어리가 아니라 겸손과 정직함을 뭉쳐 이 땅에서 높이 던져 올린 작은 공이다. 그래서 이 남자는 급속으로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궤도를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준다. 경상도 출신의 이민 1세대 부모님 밑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장남의 역할에 충실했던 그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제 속에 꿈틀대는 열정을 발견했다. 하지만 “연기 학교에 합격했지만 의대 과정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코미디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해소 할 수 있는 발산의 창구였고, 의사가 되고 나서 부업으로 진행하는 일종의 취미였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원하는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켄 정은 그가 영화계에 첫인상을 남긴 의 산부인과 의사 역에 ‘의료 행위를 잘 이해하는 코미디언’이라는 이유로 캐스팅 되었다. 운명의 나침반은 이미 그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배우로 전업하겠다는 아들에게 “네 부인은 뭐라고 하더냐. 그것이 곧 정답이다. 이제 네 가족은 아내와 아이들이니까”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인생은 짧아. 겁내지 말고 미안해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선택해”라고 격려해 준 아내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에서 나는 중국인 역할이지만 ‘빨리 빨리 빨리’라고 한국말을 쓴다. 한국 사람들이 알아듣고 웃을 수 있는 코드를 넣은 것이다. 그리고 엉뚱한 베트남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건 베트남계인 아내를 위해서 한 일이다”라는 그의 고백은 사실 힘이 되어준 가족들을 향한 애정표현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남자에게서 눈을 떼기 어려울 것 같다. 할리우드를 질주하는 보통남자라니, 도대체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글. 윤희성 nin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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