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배우라는 호칭 앞에 아역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왠지 그 배우의 능력과 재능을 나이에 가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요즘처럼 주인공의 어린 시절 분량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점점 많아지는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성인 배우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할 때가 많다. 그 중심에 MBC 에서 어린 훤을 연기했던 배우 여진구가 있다. “첫사랑에 대한 감정을 아직 느껴보지 못해서 로맨스에 몰입하는 게 어려웠다”고 했지만, 여진구가 극 중 연우(김유정)를 떠나보내며 오열하는 장면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마저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우와의 로맨스 연기를 떠올리며 아직 오지 않은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여진구는 영락없는 열여섯 소년이다. “제가 갖고 있는 첫사랑에 대한 환상은 남들보다 좀 화려한 것 같아요. 뭔가 막, 공원을 빌려서 좋아하는 여자를 가운데에 앉혀놓고 프러포즈를 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이게 제 생각에는 감독님들과 선생님들 때문인 것 같아요. 하하.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들의 첫사랑 얘기를 들으니까 저도 모르게 성대한 첫사랑을 꿈꾸고 있어요.” 제 자신도 쑥스러웠는지 멋쩍은 미소를 보이는, 카메라 밖에서도 여전히 ‘엄마 미소’를 부르는 여진구가 고른 영화들은 선배 배우들의 연기를 부러워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혹은 여느 또래들처럼 반전과 스릴러를 좋아하는 열여섯 소년의 입장에서 찬찬히 생각하면서 보게 된 작품들이다.

1. (The Usual Suspects)
1995년 | 브라이언 싱어
“제가 반전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데 매니저 형이 “네가 좋아하는 반전 드라마는 다 여기서 출발했다”면서 를 추천해 주셨어요. 바로 봤죠. (웃음) 영화를 보다 보니까 빠져들더라고요. ‘과연 카이저 소제는 누구일까’라고 생각하면서 봤거든요. 갑자기 형사 분이 뭔가를 알아채고 절름발이 버벌을 찾으러 갔는데, 그 분은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지잖아요. 반전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나중에 이런 스릴러 영화에도 한 번 출연하고 싶어요.”를 봤든 보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절름발이 버벌의 마지막 발걸음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후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에서까지 누군가 반전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늘 ‘카이저소제’일 정도로 의 반전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2. (The Client)
2011년 | 손영성
“을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정우, 박희순, 장혁 선배님들의 연기가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하정우 선배님은 평소에 카리스마 있는 배우시고, 박희순 선배님의 연기 스타일도 굉장히 좋아하고, 또 장혁 선배님은 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은근히 법정 영화를 좋아해요. 은 어떤 스타일의 법정 영화일까 기대하면서 봤는데 역시 대단하더라고요.”

하정우, 박희순, 장혁. 각자가 하나의 작품을 책임지고 짊어질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세 배우가 뭉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을 봐야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그들이 만나 뿜어내는 에너지는 의 법정을 더욱 뜨겁게 달군다. 살인당한 아내의 시체는 사라졌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남편은 섬뜩할 정도로 태연하다.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사건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3. (Welcome To Dongmakgol)
2005년 | 박광현
“어렸을 때 멋있게 봤던 영화에요. 많은 분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팝콘이 터지는 순간도 좋았지만, 저는 남과 북이 서로 싸우다가 같이 전사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남과 북이 전쟁 중인데, 해맑게 같은 마을에서 노는 모습도 좋아 보였어요. 훗날 우리나라도 진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동막골,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며 “마이 아파”를 외쳐대는 여일(강혜정). 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공간과 사람이다. 그러나 어느 날 그 곳에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모이게 되면서 동막골은 순식간에 가장 치열하고 긴장감 넘치는 마을로 변한다.

4. (The Lincoln Lawyer)
2011년 | 브래드 퍼맨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변호사는 범인을 보호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에 등장하는 변호사는 제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범인한테 왜 거짓말을 하냐고 다그치기도 하고, 사정없이 범인을 몰아치는 모습이 참 신선했어요.”돈을 밝히는 변호사 미키 할러(매튜 맥커너히)와 자신이 진범임을 속이고 있는 의뢰인 루이스 룰레(라이언 필립)는 여느 변호사와 의뢰인처럼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관계가 아니라, 서로 숨기고 있는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대립구도에 놓여있다. 속물 변호사와 악질 의뢰인의 치열한 공방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5.
2011년 | 김정환
“SBS 에서 젊은 이도를 연기했던 송중기 형의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에서는 와는 전혀 다른 촐싹대는 연기를 보여주셨잖아요. 와, 중기 형은 잘생긴 줄로만 알았는데 연기도 잘하시는구나. (웃음) 정말 재밌게 봤던 영화에요.”

남자는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하고, 여자는 돈이 아까워서 연애를 안 한다. 가장 아름답고 한창 연애를 해야 될 20대, 그러나 2012년의 20대는 돈 때문에 마음대로 연애도 못하는 슬픈 청춘들이다. 는 억지로 판타지를 끼워 넣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진짜 구질구질하게만 표현하진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만의 귀엽고 발랄한 매력이 있는 영화.

“을 통해 연기적으로 한 걸음 더 진화한 것 같아요.” 일부러 슬픈 상상을 하며 눈물 연기를 했던 전작과 달리 대본에만 집중해 감정을 잡았던 에 대해, 여진구는 이렇게 말했다.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긴 조금 거창할지 몰라도 이 여진구가 스스로 무언가를 깨우치게 해 준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동안 제가 좀 강한 역할을 많이 맡다보니까 세자에 어울리지 않는 무사 톤이 나왔어요. 세자는 차분하고 근엄해야 되는데 제가 자꾸 사납고 날아다니는 톤으로 대본을 읽으니까 김도훈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연기를 아예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걸 처음부터 쌓아나갔고, 예전 작품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올해는 학교생활에 전념할 예정이지만 처럼 좋은 작품이 들어온다면 언제든지 카메라 앞에 설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또 한 번 놀랄 준비는, 언제든지 되어있다.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