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은 오랜만에 등장한 탄탄한 드라마다. 줌마렐라 드라마의 기틀을 잡은 의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는 기형적인 캐릭터와 우연의 남발, 판에 박힌 대사들로 오염되기 이전의 드라마가 지닌 미덕을 되살려낸다. 자녀가 “천민으로 전락”하지 않게 교육하는 것이 지상과제인 엄마들의 집단 히스테리를 공포심을 자아낼 정도로 세밀하게 포착했고,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선적이고 차가운 이 세계를 김희주 기자와 김선영 TV평론가가 들여다보았다. /편집자주
대치동으로 이주하면서 서래(김희애)의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극명하게 단절된다. 그것은 대치동이 “다른 기준”을 용납하지 않는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학벌주의, 계급주의, 가족주의라는 한국 사회 3대 병폐가 재생산되는 공간이며, 그 모순은 ‘대치동 엄마’라는 특정한 프레임 속에 압축되어 있다. 서래에게 요구되는 ‘아내의 자격’이란 바로 그 프레임에 잘 적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혼여성을 가두는 ‘아내의 자격’이라는 프레임
하지만 대치동에 입성한 순간부터 서래는 그 프레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갇힌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녀를 가두는 것은 ‘지역사회’의 검열적 시선이다. 그것은 인간을 오로지 학벌과 계급의 기준으로만 판단한다. 그래서 “출신성분이 다른” 서래는 애초에 무시당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결이(임제노)가 입시학원 입학시험에서 꼴찌를 기록하자 가차 없이 멸시 당한다. 이는 서래의 가정 내 위치로도 이어진다. 그 프레임의 신봉자들인 남편과 시댁은 서래의 자격과 결격을 심사하는 ‘갑’이며, 그녀는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엄마로서 무상으로 노동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사도우미보다 못한 ‘을’일 뿐이다. 결국 모든 자격을 상실한 서래가 가정 밖으로 내쫓긴 뒤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기 위해 집을 찾은 10회에서 드라마는 그녀의 가정 내 위치를 정교한 연출을 통해 그려낸다. 집 정리를 마친 뒤 서래가 집안을 둘러보는 장면에서, 가족사진과 그림처럼 프레임에 둘러싸인 소품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수평으로 이동하며 문에 기댄 서래를 포착한다. 그 옆의 열린 문으로 거실의 화분이 한 컷에 잡힌다. 서래는 마치 정물이나 식물 같은, 집안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깔끔해진 집을 보고도 상진(장현성)은 그녀의 흔적을 눈치 채지 못하고 가사도우미가 다녀간 것으로 생각한다. 드라마는 그렇게 가사도우미나 ‘튜터맘’으로 쉽게 대체되는 서래의 빈자리를 통해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는 중년 여성의 모순적 현실을 지적한다.
“나, 여자, 여자 사람 윤서래”
서래가 적응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했던 ‘대치동 엄마’ 프레임을 탈출하는 계기가 외도라는 것은 흥미롭다. 불륜이야말로 가정의 윤리 프레임 안에서 최악의 비윤리적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서래의 불륜을 “남녀 간의 지저분한 꼴”과 같은 전형적 전개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뒤틂으로써 그 프레임을 흔든다. 가령 서래와 태오(이성재)의 팬션 사진을 본 상진과 시댁 식구들은 ‘추잡한 행위’에 분노하지만, 서래는 거기서 정말 잠만 자고 나온다. 또한 불륜 현장을 덮치려는 상진을 피하기 위해 창문 밖으로 탈출하는 태오의 모습은 KBS 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지만, 실상 그는 잠든 서래를 위로하기 위해 옆을 지켰을 뿐이다. 세상은 둘을 ‘같이 잔 사이’로 요약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한다. 진짜 불륜은 오히려 상진과 현태(박혁권)의 몫이다.
서래는 태오로 인해 “나 여자, 여자 사람 윤서래”임을 자각하게 된다. 인간이자 여자라는 정체성은 대치동의 프레임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동등한 인간이자 남녀로 만난 둘의 관계는 서래가 가정에서 유일하게 ‘말과 마음이 통했던’ 결이와의 그것처럼 ‘함께 답을 찾아가는’ 관계로 그려진다. 프레임의 바깥을 꿈꾸던 둘은 만날 때마다 질문을 던지고 고민을 나누며 함께 중년의 성장통을 겪는다. 그것이 서래의 불륜담을 기존의 ‘아줌마 자아찾기’ 서사와 차별화하는 지점이다. 서래는 남편의 외도로 “각성”한 뒤 새로운 자아를 찾는 ‘해방된’ 중년 여성이 아니라 이혼 후에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여성이다. 그래서 대치동의 “바깥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 동네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겠다던 그녀의 홀로서기는 마냥 멋지게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서래는 일 년 뒤에도 태오와 여전히 연애 중이며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한다. 그 ‘불륜 뒤 힘겨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살아있음’을 택할 것인지를 물으려는 의도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아내의 자격’을 묻는 괴물들에게 역으로 ‘인간의 자격’을 되묻는다.
글 김선영의 서래(김희애)와 태오(이성재)는 왜 그냥 친구가 될 수 없었나. 왜 불륜이어야 했나.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격정적인 키스를 나눈 사이라 하기엔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존댓말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친구 같다. 욕망의 대상이기 전에 정신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대치동이라는 전쟁터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전우로 그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이는 서래가 쫓겨나야 했고 자격을 심판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태오와의 만남이 “큐 신호”가 되어 서래는 대치동 생태계로부터, 남편과 시누이 시부모의 세계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는 양육의 세계로부터 쫓겨난다. 그렇게 아내의, 며느리의, 엄마의, 결국 지금 이 시대 여자의 자격을 추궁 당한다.
서래의 불륜이 까발리는 갑의 세계
상진(장현성)은 대치동 룰에 따르길 거부하는 서래에게 “다양성의 시대니 뭐니 하지만 인간 딱 두 부류야. 갑과 을. 나는 내 아들이 갑이면 좋겠거든”이라고 소리쳤다. 이처럼 ‘대치동 러브 어페어’인 줄 알았던 은 알고 보니 모든 것이 갑을관계로 치환되는 ‘대치동 부당거래’다. 불륜 통속극이 아니라 호러 생태보고서다.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 갑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 지위를 유지하고 대물림 하는 행태를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리얼리티가 실로 무시무시하다. 반면, 공고한 갑님들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애쓰는 을들의 투쟁기는 처절하고 때로 비참하기까지 하다. 강남 사교육의 메카 대치동, 뼛속까지 8학군에 고위 공무원과 명문 여대 출신 부모님을 둔 남편이자 남자, 아이의 미래를 좌우할 학원장, 가문의 명망을 유지할 자식, 이들은 모두 갑이다. 한편, 대치동 바깥 혹은 아래의 모든 곳, 초라한 배경에 치매 걸린 엄마와 반찬 가게 하는 동생을 둔 아내이자 여자, 혹여나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 전전긍긍하는 학부모, 자식이 제일 겁나는 부모, 이들은 모두 을이다. 이 먹이 사슬에서 을은 복종하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다.
자식 교육은 당사자의 장밋빛 미래라는 명분을 뒤집어썼지만 실상은 부모들 욕망의 투영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껍데기만 남은 신화가 되어버린 오늘날, 이전 세대가 죽을 힘을 다 해 획득한 갑의 자격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기 위해서는 가족 공동체 차원의 사투가 필요하다. 결(임제노)의 튜터맘 비용으로 시아버지(이정길)는 적금을 기꺼이 내놓는다. 손자의 낙오는 곧 자신의 실패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 구성원은 금전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충분히 희생할 것을 요구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받고 종국엔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 상진의 가족에겐 서래의 불륜 자체보다 그로 인해 결이 학원에서 잘린 것이 더 견딜 수 없는 타격이다. 서래에 대해 이해당사자인 지선(이태란)이 아닌 시누이 명진(최은경)이 머리채를 잡는 심판자의 지위를 갖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내 오빠의 아내, 내 부모의 며느리, 그 어느 것도 결격이야”라는 명진의 선언과 병적인 거부 반응은 서래의 일탈 행위가 자신이 속한 가족 공동체와 대치동 생태계에 혼란을 가져오고 필사적으로 감춰온 허위를 까발리기 때문이다. 같은 죄를 짓고도 서래에 비해 태오가 덜 봉변당하고 더 태연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태오와 지선에게는 지켜야 할 가문도 희생해야 할 가족 공동체도 명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부터 남자이자 남편이라는 점에서 유리한 자격을 갖고 있던 태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인과 확신, 이를 지선에게 설득하는 것뿐이다. 태오는 갑으로서 지켜야 하거나 갑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서래보다 현저히 적다.
의 자격은 공포물이다
서래의 호흡곤란은 이 무시무시한 갑님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예견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순결한 피해자는 아니다. “세계관이 너무 순진”하던 서래도 궁지에 몰리자 지선의 신상을 파악하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꾀하고 돈 봉투를 내민다. 상진에게 “나도 슬쩍 묻어 살아야지, 그럼 참 편할 거야, 그랬거든. 당신 조건에 혹했지”라고 고백했듯이, 그녀 역시 갑의 세계에 편입하고자 욕망했고 결혼 생활을 통해 이를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그러나 대치동은 자전거를 타고서는 쫓아갈 수 없는 속도의 세계였고, 결국 서래는 낙오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쫓겨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내추럴 본 갑’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물론 전혀 소득 없는 패배는 아니다. 대치동에 와서 배운 유도로 상진을 패대기친 것처럼.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동네 바깥에 사는 엄마”가 된 서래는 이 병든 생태계 역시 패대기치고 아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갑들은 여전히 코웃음 칠 것 같다. 이 무서운 패배감이야 말로 이 공포물인 진짜 이유다.
글 김희주
글. 김선영(TV평론가)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편집. 이지혜 seven@
대치동으로 이주하면서 서래(김희애)의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극명하게 단절된다. 그것은 대치동이 “다른 기준”을 용납하지 않는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학벌주의, 계급주의, 가족주의라는 한국 사회 3대 병폐가 재생산되는 공간이며, 그 모순은 ‘대치동 엄마’라는 특정한 프레임 속에 압축되어 있다. 서래에게 요구되는 ‘아내의 자격’이란 바로 그 프레임에 잘 적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혼여성을 가두는 ‘아내의 자격’이라는 프레임
하지만 대치동에 입성한 순간부터 서래는 그 프레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갇힌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녀를 가두는 것은 ‘지역사회’의 검열적 시선이다. 그것은 인간을 오로지 학벌과 계급의 기준으로만 판단한다. 그래서 “출신성분이 다른” 서래는 애초에 무시당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결이(임제노)가 입시학원 입학시험에서 꼴찌를 기록하자 가차 없이 멸시 당한다. 이는 서래의 가정 내 위치로도 이어진다. 그 프레임의 신봉자들인 남편과 시댁은 서래의 자격과 결격을 심사하는 ‘갑’이며, 그녀는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엄마로서 무상으로 노동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사도우미보다 못한 ‘을’일 뿐이다. 결국 모든 자격을 상실한 서래가 가정 밖으로 내쫓긴 뒤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기 위해 집을 찾은 10회에서 드라마는 그녀의 가정 내 위치를 정교한 연출을 통해 그려낸다. 집 정리를 마친 뒤 서래가 집안을 둘러보는 장면에서, 가족사진과 그림처럼 프레임에 둘러싸인 소품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수평으로 이동하며 문에 기댄 서래를 포착한다. 그 옆의 열린 문으로 거실의 화분이 한 컷에 잡힌다. 서래는 마치 정물이나 식물 같은, 집안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깔끔해진 집을 보고도 상진(장현성)은 그녀의 흔적을 눈치 채지 못하고 가사도우미가 다녀간 것으로 생각한다. 드라마는 그렇게 가사도우미나 ‘튜터맘’으로 쉽게 대체되는 서래의 빈자리를 통해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는 중년 여성의 모순적 현실을 지적한다.
“나, 여자, 여자 사람 윤서래”
서래가 적응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했던 ‘대치동 엄마’ 프레임을 탈출하는 계기가 외도라는 것은 흥미롭다. 불륜이야말로 가정의 윤리 프레임 안에서 최악의 비윤리적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서래의 불륜을 “남녀 간의 지저분한 꼴”과 같은 전형적 전개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뒤틂으로써 그 프레임을 흔든다. 가령 서래와 태오(이성재)의 팬션 사진을 본 상진과 시댁 식구들은 ‘추잡한 행위’에 분노하지만, 서래는 거기서 정말 잠만 자고 나온다. 또한 불륜 현장을 덮치려는 상진을 피하기 위해 창문 밖으로 탈출하는 태오의 모습은 KBS 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지만, 실상 그는 잠든 서래를 위로하기 위해 옆을 지켰을 뿐이다. 세상은 둘을 ‘같이 잔 사이’로 요약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한다. 진짜 불륜은 오히려 상진과 현태(박혁권)의 몫이다.
서래는 태오로 인해 “나 여자, 여자 사람 윤서래”임을 자각하게 된다. 인간이자 여자라는 정체성은 대치동의 프레임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동등한 인간이자 남녀로 만난 둘의 관계는 서래가 가정에서 유일하게 ‘말과 마음이 통했던’ 결이와의 그것처럼 ‘함께 답을 찾아가는’ 관계로 그려진다. 프레임의 바깥을 꿈꾸던 둘은 만날 때마다 질문을 던지고 고민을 나누며 함께 중년의 성장통을 겪는다. 그것이 서래의 불륜담을 기존의 ‘아줌마 자아찾기’ 서사와 차별화하는 지점이다. 서래는 남편의 외도로 “각성”한 뒤 새로운 자아를 찾는 ‘해방된’ 중년 여성이 아니라 이혼 후에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여성이다. 그래서 대치동의 “바깥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 동네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겠다던 그녀의 홀로서기는 마냥 멋지게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서래는 일 년 뒤에도 태오와 여전히 연애 중이며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한다. 그 ‘불륜 뒤 힘겨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살아있음’을 택할 것인지를 물으려는 의도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아내의 자격’을 묻는 괴물들에게 역으로 ‘인간의 자격’을 되묻는다.
글 김선영의 서래(김희애)와 태오(이성재)는 왜 그냥 친구가 될 수 없었나. 왜 불륜이어야 했나.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격정적인 키스를 나눈 사이라 하기엔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존댓말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친구 같다. 욕망의 대상이기 전에 정신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대치동이라는 전쟁터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전우로 그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이는 서래가 쫓겨나야 했고 자격을 심판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태오와의 만남이 “큐 신호”가 되어 서래는 대치동 생태계로부터, 남편과 시누이 시부모의 세계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는 양육의 세계로부터 쫓겨난다. 그렇게 아내의, 며느리의, 엄마의, 결국 지금 이 시대 여자의 자격을 추궁 당한다.
서래의 불륜이 까발리는 갑의 세계
상진(장현성)은 대치동 룰에 따르길 거부하는 서래에게 “다양성의 시대니 뭐니 하지만 인간 딱 두 부류야. 갑과 을. 나는 내 아들이 갑이면 좋겠거든”이라고 소리쳤다. 이처럼 ‘대치동 러브 어페어’인 줄 알았던 은 알고 보니 모든 것이 갑을관계로 치환되는 ‘대치동 부당거래’다. 불륜 통속극이 아니라 호러 생태보고서다.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 갑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 지위를 유지하고 대물림 하는 행태를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리얼리티가 실로 무시무시하다. 반면, 공고한 갑님들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애쓰는 을들의 투쟁기는 처절하고 때로 비참하기까지 하다. 강남 사교육의 메카 대치동, 뼛속까지 8학군에 고위 공무원과 명문 여대 출신 부모님을 둔 남편이자 남자, 아이의 미래를 좌우할 학원장, 가문의 명망을 유지할 자식, 이들은 모두 갑이다. 한편, 대치동 바깥 혹은 아래의 모든 곳, 초라한 배경에 치매 걸린 엄마와 반찬 가게 하는 동생을 둔 아내이자 여자, 혹여나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 전전긍긍하는 학부모, 자식이 제일 겁나는 부모, 이들은 모두 을이다. 이 먹이 사슬에서 을은 복종하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다.
자식 교육은 당사자의 장밋빛 미래라는 명분을 뒤집어썼지만 실상은 부모들 욕망의 투영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껍데기만 남은 신화가 되어버린 오늘날, 이전 세대가 죽을 힘을 다 해 획득한 갑의 자격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기 위해서는 가족 공동체 차원의 사투가 필요하다. 결(임제노)의 튜터맘 비용으로 시아버지(이정길)는 적금을 기꺼이 내놓는다. 손자의 낙오는 곧 자신의 실패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 구성원은 금전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충분히 희생할 것을 요구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받고 종국엔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 상진의 가족에겐 서래의 불륜 자체보다 그로 인해 결이 학원에서 잘린 것이 더 견딜 수 없는 타격이다. 서래에 대해 이해당사자인 지선(이태란)이 아닌 시누이 명진(최은경)이 머리채를 잡는 심판자의 지위를 갖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내 오빠의 아내, 내 부모의 며느리, 그 어느 것도 결격이야”라는 명진의 선언과 병적인 거부 반응은 서래의 일탈 행위가 자신이 속한 가족 공동체와 대치동 생태계에 혼란을 가져오고 필사적으로 감춰온 허위를 까발리기 때문이다. 같은 죄를 짓고도 서래에 비해 태오가 덜 봉변당하고 더 태연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태오와 지선에게는 지켜야 할 가문도 희생해야 할 가족 공동체도 명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부터 남자이자 남편이라는 점에서 유리한 자격을 갖고 있던 태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인과 확신, 이를 지선에게 설득하는 것뿐이다. 태오는 갑으로서 지켜야 하거나 갑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서래보다 현저히 적다.
의 자격은 공포물이다
서래의 호흡곤란은 이 무시무시한 갑님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예견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순결한 피해자는 아니다. “세계관이 너무 순진”하던 서래도 궁지에 몰리자 지선의 신상을 파악하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꾀하고 돈 봉투를 내민다. 상진에게 “나도 슬쩍 묻어 살아야지, 그럼 참 편할 거야, 그랬거든. 당신 조건에 혹했지”라고 고백했듯이, 그녀 역시 갑의 세계에 편입하고자 욕망했고 결혼 생활을 통해 이를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그러나 대치동은 자전거를 타고서는 쫓아갈 수 없는 속도의 세계였고, 결국 서래는 낙오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쫓겨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내추럴 본 갑’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물론 전혀 소득 없는 패배는 아니다. 대치동에 와서 배운 유도로 상진을 패대기친 것처럼.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동네 바깥에 사는 엄마”가 된 서래는 이 병든 생태계 역시 패대기치고 아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갑들은 여전히 코웃음 칠 것 같다. 이 무서운 패배감이야 말로 이 공포물인 진짜 이유다.
글 김희주
글. 김선영(TV평론가)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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