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납치됐다. 그리고 범인은 그녀의 목숨을 대가로 총리에게 상식 밖의 일을 요구한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영혼을 희생시킬 수 있을까. 사람들은 고민하고, 망설이지만 시간은 많지 않다. 작년 12월, 영국의 채널 4를 통해 방송된 3부작 옴니버스 드라마 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지극히 고전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이 첨단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작품은 새롭고 충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은 과연 얼마나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정보는 쉽사리 감춰지지 않고, 사람들은 더 빨리, 더 자극적인 것을 더 정확히 알아 낼 수 있지만, 그런 조건들이 과연 더 옳은 결정을 담보하는 것일까.
퍼져나가는 정보, 고민 없는 흡수
극단적이고 황당한 설정을 조금만 덜어내면 가 제시하는 상황은 오늘날의 바로 우리들이 처해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드라마 속의 영국 정부는 납치 테러와 관련한 뉴스 보도를 제어하지만, 방송 여부와 무관하게 정보는 온라인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미디어의 권력은 정보, 그 자체로 이양되었고 정보를 사용하지 않는 미디어는 그 권위를 잃는다. 사람들은 미디어로부터 정보를 획득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정보를 통해 미디어를 평가한다. 방송은 대중을 장악하는 대신 이들과 경쟁을 벌이고, 여기서 이기기 위해서는 더 은밀한 정보가 동원된다.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는 수사 팀에게 총리는 “Someone Knows something!”이라고 외쳤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정보망 발달의 절정기인 현대를 요약한 문장이기도 하다. 더 이상 미궁은 없다. 나에게 없을 뿐, 열쇠는 어디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열쇠가 아닌 문이다.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사건이 트위터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드라마 속 일련의 과정이 낯설지 않은 것은 이것이 블로그를 통해 공개된 연예인의 사생활이 번져나가는 현실과 판에 박은 듯 닮아 있기 때문이다. 가십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이며, 그 핵심을 담은 짧은 영상은 카카오톡으로, SNS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정보에 접근하는 방법에 통달한 반면,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정보를 대하는 태도를 학습하지 못했고, 이러한 약점을 파고드는 소식들은 판단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선택된 수용은 전달이지만, 지체 없이 흡수되는 것은 감염에 가깝다. 그리고 감염자들은 넘치는 열쇠로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동안, 그 문에 대한 고민을 간과 한다. 사실을 전달하기에 140자는 충분하지만,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말이다. 타임라인의 파도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최근 증가하는 정치인들의 예능프로그램 출연을 단순히 방송의 차원에서 분석할 수 없는 것 역시 이러한 환경적 변화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송이 생산하는 이야기는 SNS를 통해 재가공 되며, 이 과정에서 왜곡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정치를 보지 않는 사람에게 방송은 캐릭터를 남기고, 방송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 트위터는 이미지를 남긴다. 예컨대, tvN 에 출연한 국회의원 강용석은 방송 이후 ‘논리정연한’ 인물로 재평가 되었으나 이것은 그의 화술에 관한 지극히 단편적인 감상일 뿐이다. 그의 고소 만능주의에는 법률의 완전한 정당성에 대한 검증이 배제되어 있으며,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하기 위해 타인을 억울한 처지에 밀어 넣는 야만성은 논리의 영역으로 해명할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강용석 의원은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정치적인 능력을 무엇 하나 입증하지 않고도 인간적인 매력만으로 정치적 호감도를 상승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개척했다. 솔직한 사람은 인간적인가. 인간적인 사람은 좋은 정치인인가. 나아가 한 시간 남짓한 방송은 과연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인가. 질문은 생략되고 타임라인에 남은 것은 엄지를 들어 올리거나, 내린 간단한 표식뿐이다.
속 영국인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결국 총리가 하나의 문을 열게 했고, 그 이후의 일은 쉽게 회복될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인물들은 가상의 계급사회 안에서, 기억장치를 통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지만 그 결과는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 믿음이란 “방금 RT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RT 부탁”하는 종류의 가벼운 동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념의 닻을 내리고, 가치를 말뚝에 메어 타임라인의 파도로부터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지켜 낼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믿음은 온전해 진다. 횡으로 급속히 확장되는 지식은 결코 오랜 시간에 걸쳐 종으로 깊어지는 지혜와 같지 않고,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도달하기 전에 확인할 것은 정확한 방향이다. 형식으로서 SNS는 미디어다. 명제는 여전하다. 그러나 모든 미디어가 유의미한 정보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사용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진실이다. 때때로 미디어가 누군가의 믿음을 전염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은 더더욱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는 감염자이며, 숙주이며, 동시에 치료제다. 그 정체성마저도 ‘누군가’가 알고 있는 ‘무엇’이 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전송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결심이다.
글. 윤희성 nin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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