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경성.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마라토너 김준식(장동건)은 마라톤에 대한 꿈만큼은 빼앗기지 않은 채 오늘도 달린다. 하지만 어렵게 참가한 올림픽 선발전에서 불공정한 판단으로 실격 처리가 되자 폭동이 발생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다. 그곳에서 김준식은 어린 시절부터 마라톤 경기까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일본인 하세가와 타츠오(오다기리 죠)를 만난다. 일본군 대좌로 전장에 투입된 타츠오는 황국 군인으로의 자부심과 광기에 불타고 있고, 전장의 총알받이가 될 운명에 놓인 준식은 언제라도 조선 땅으로 달려가기 위해 마라톤화를 놓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 불길이 치솟고, 피가 튀는 전장을 통과하는 그들의 몸에는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의 군복이 차례대로 입혀진다.


강제규의 제자리 뛰기 150분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까지 한·중·일을 대표하는 간판급 배우들, 촬영감독 이모개, 정도안 특수효과 감독 등 한국 최고의 스태프들, 한국 최대 규모의 창전리 세트, 프리 프로덕션 14개월, 156회 차 촬영, 280억의 제작비 등등. 를 수식하는 숫자와 규모는 역대 최다, 역대 최강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는 이렇게 최고급 재료를 몽땅 때려 넣고 긴 시간 끓여낸다고 해서 감칠맛이나 깊은 맛이 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거기엔 좋은 요리사와 절대적이거나 창의적인 레시피 그리고 적절한 온도가 필요하다. 치열하게 뜨겁거나 뼛속까지 차갑거나. 하지만 쉬지 않고 펑펑 터지는 비주얼 포탄과는 달리 의 이야기는 좀처럼 화력을 얻지 못하고 미지근하게 동어반복을 이어간다. 영화는 총 4번의 달리기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인 김준식과 일본인 타츠오의 마라톤, 일본군과 소련군, 소련군과 독일군,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 하지만 이 4번의 대결은 고저나 극적 전개 없이 그저 병렬식으로 나열될 뿐이다. 결국 경성에서 노르망디까지 바통터치처럼 군복을 갈아입고 반환점 없이 달리기만 하는 150분간의 장기 릴레이는 순간 순간 근사한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지루한 인상을 안겨준다.

, , 까지 강제규는 컴퓨터그래픽 기술과 대규모 촬영에 있어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온 감독이다. 그가 열어준 기술적 규모적 신세계에 관객들은 상업적인 성공으로 보답했고, 그것이 기본적으로 1000만 이상이 관람해야 비로소 수익을 낼 수 있는 280억이라는 제작비가 들어간 라는 괴물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규모와 사이즈에 대한 열망은 스토리의 퇴화와 함께 결정적으로 캐릭터의 매력마저 잠식시켜 가고 있다. 장동건이 연기한 김준식은 특히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맛을 싱겁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재료다. 그저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성실하고 착한 국가대표 선수 같은 준식의 캐릭터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분노도 인간적인 갈등도 보여주지 않는다. “황군에겐 후퇴란 없다, 황군은 혼백이 되어서도 진격한다!”며 악마에 가까운 명령을 내리던 타츠오의 전향 역시 적절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저 전형적인 조연 캐릭터에서 동포를 사형대로 이끌 수 있는 비정한 ‘안똔’으로 변모하는 종대(김인권) 정도가 유일하게 긴장감을 안겨주는 캐릭터다. 강제규 감독은 전장에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김준식처럼 지난 15년간 한 번도 쉬어 본 적 없이 한 길을 달려온 선수다. 하지만 그 끈기와 집요함이 그를 매번 더 먼 곳에 데려다 놓지는 못했다. 강제규의 제자리 뛰기, 는 그의 주법에 정비가 필요하다는 경고음을 내는 영화다.

글. 백은하 기자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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