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시상식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올 한 해 드라마가 우리에게 선물한 사소한 행복들을 ‘대상’이나 ‘최우수상’, ‘인기상’ 트로피에 모두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는 2010 드라마계의 ‘땡큐’ 10을 선정했다. 때로는 배우들의 훈훈한 비주얼로, 손발이 오그라들더라도 눈과 입은 웃게 만드는 명대사로, 등장만으로도 반가웠던 캐릭터로, 시청자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연애질로 시청자들을 들었다 놓은 드라마들에 외쳐보자. 쌩유베리감사!


효녀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을 던져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쳤다. 하지만 KBS 의 ‘잘금 4인방’은 시청자들의 눈을 밝게 만드는 후광으로 모처럼 수신료 2천5백 원을 아깝지 않게 했다. ‘꿀피부 꽃도령’ 구용하(송중기)가 얼굴을 가린 부채를 접으면서 윙크를 하면 문재신(유아인)은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걸오앓이’를 전염시켰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좋은 예 이선준(박유천)이 그림자가 질 만큼 긴 속눈썹 아래로 김윤희(박민영)를 바라보며 은근한 어리광을 부리면 김윤희는 상큼한 미소와 애교로 화답하였으니 지금이라도 성균관 문 앞에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이는 잘금 4인방에 대한 흑심이 아니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게 해 주어 고맙다는 시청자의 마음일 뿐이다.


시작은 평범했다. KBS 의 기훈(천정명)이 “은조야-”하고 불렀을 뿐인데, 굳게 닫혀 있던 은조(문근영)의 마음이 열렸다. 배고픈 기훈을 위해 손수 밥상을 차렸다. 잠든 그를 위해 손수 양말을 벗겨줬다. 전국 수많은 여성들이, 심지어 ‘은조’도 아니면서 거울을 향해 혼자 “은조야-”하고 불렀다. 가끔 제 이름도 넣어 불렀다. 물론 답은 없었다. 시작은 달콤했다. 의 매리가 “자기야아아아~”하고 달려갔을 때, 무결(장근석)은 “오~ 매리~”하고 불렀다. 하지만 사랑의 주문이 시청자가 감당할 수 있는 닭살지수를 넘는 것은 곤란하다. 연말을 맞은 솔로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억.제.하고 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썸남’, 아직 사귀지는 않지만 ‘썸씽’이 자주 발생하는 묘한 관계에 있는 남자. 여주인공이 힘들 때,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지만 구질구질한 생색 따위 내지 않고 ‘쿨’과 ‘로맨틱’ 사이를 오가며 여성시청자들의 마음을 강제 징발해간 그는 박시후다. SBS 에서 눈물겨운 지극정성과 느끼하지 않은 장난기로 마혜리(김소연)를 조련한 ‘서변’은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녹음한 알람시계를 선물하며 마검(김소연)의 ‘심남’으로 다가왔고, ‘이거’ 키스와 함께 ‘썸남’의 끝판왕으로 등극했다. 여세를 몰아 출연한 MBC 의 재벌 2세 구용식은 젊은 여직원들이 꼬시고 싶어 하는 ‘꼬픈남’으로 업그레이드 됐지만, 유부녀 황태희(김남주)에게만큼은 여전히 오리지널 ‘썸남’이다. 물론 그녀의 펑크 난 타이어를 직접 갈아 준 사람은 ‘썸남’의 ‘썸남’, 비서 강우(임지규)다.


김주원의 말처럼 사랑이 못난 “호르몬 질병”이라면, ‘앓이’는 드라마 속 캐릭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신종 질병이다. 게다가 환자들이 치료를 거부하고 그 고통을 즐기는 유일한 질병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올해 신종플루보다 더욱 기승을 부린 ‘앓이’는 서변앓이, 태섭앓이, 걸오앓이라 할 수 있다. 아닌 척 장난치는 척 해도 마혜리의 모든 것을 다 챙겨주는 의 한국판 슈퍼맨 서인우(박시후), 아련아련 청순가련 열매를 듬뿍 섭취한 것 같은 의 태섭(송창의), 원래 여자를 꺼리고 특히 윤희 앞에서 고백 한 마디 제대로 못하지만 항상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의 걸오(유아인), 이 가운데 하나라도 걸리면 바로 만성질환이 된다. 약도 없다.


최현욱(이선균)의 작업멘트를 못 알아들은 척 했다. 하지만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달라며 은근히 스킨십을 유도했다. 연애에 숙맥인 척 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먼저 기습뽀뽀를 한 건 ㅅㅞㅍ이 아니라 그녀였다. ‘밀당’이 뭔지 모르는 척 했다. “넌 니가 죽고 못 사는 파스타가 좋냐, 내가 좋냐?”는 ㅅㅞㅍ의 말에 무조건 “ㅅㅞㅍ~♡”이라 애교를 부리더니 머지않아 “셰프님 나 좋아하는 거 티 난다 오바!”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MBC 의 유경(공효진)은 붕어의 외피를 두른 초고단수 여우였다. 날로 발전하는 여주인공들의 스킬, 어디서 강의 개설 안 해주나요?

드라마 속 재벌 2세들은 늘 가난한 여자와 엮인다. 아무래도 살면서 누군가가 뿌린 물을 뒤집어쓰거나 따귀를 맞은 적이 없다 보니 분노 또한 없어 그런 상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나에게 이런 여잔 네가 처음이야!”라며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SBS 의 주원(현빈)은 ‘사회적인 목적’으로 가난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다른 재벌 2세다. 첫눈에 반한 라임(하지원)이 다치자 굳이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이유는 사회지도층의 윤리이자 일종의 선행이며 수준 높은 가정교육의 결과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지도층의 윤리가 야구방망이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김주원은 다음과 같은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전망이다. 님은 연애를 이념적으로 하시는군요?


MBC 에서 자신의 신세한탄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식모 세경과 서열 싸움을 하던 무능력한 사내 ‘주얼리 정’에 완벽히 빙의되었던 그가 곧이어 SBS 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 조필연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정보석이 선 굵은 악역을 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그는 또다시 말 안 듣는 놈은 수틀리면 죽여 버리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해공갈까지 감행하는 악의 화신 ‘필연神’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제 MBC 에선 냉혹한 사업가 유대권이 되어 극을 지배한다. 올 한 해 세상 오만 가지 보석 중에 가장 찬란하게 빛난 주얼리는 정보석이다.


드라마 안팎을 막론하고 온통 커플천국이다. 의 태섭(송창의)이 “내가 고맙다는 말 했던가?”라고 말하자 경태(이상우)는 “내가 사랑한단 말 했던가?”라 대답한다. 어쩌면 “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는 광고는 이 아름다운 커플에 대한 질투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KBS 와 를 함께 작업하면서 꼬박 1년을 붙어 다닌 곽정환 감독-천성일 작가 콤비도 있지만 신우철 감독과 김은숙 작가는 2004년 SBS 을 시작으로 현재 방영 중인 까지 총 여섯 작품을 공동 작업했다. 어쨌건 세 커플 덕분에 올 한 해가 행복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KBS 에서 착한 효녀 연이였다. 죽었다. 초옥(서신애)이의 몸에 영혼이 빙의됐다. MBC 첫 회에서 돈에 집착하는 나영(신은경)의 아역으로 등장했다. 그 다음 주, 나영을 쏙 빼닮은 딸 인기(서우)의 아역으로 재등장했다. “내는 다음 세상에서 살인마 아버지 말고 훌륭한 아버지한테서 새로 태어날 기다!”라고 외치며 고향을 등졌다. 그리고는 SBS 에서 순정(이청아)의 아역으로 환생했다. 심지어 에서 자신을 죽였던 윤두수(장현성) 나으리가 이번 생의 아버지다. 죽어야 사는 아이, 이쯤 되면 ‘아역계의 김갑수’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다.


세상 모든 사람은 연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tvN 의 영애(김현숙)가 이럴 수는 없다. 시즌 6까지 족발을 철근같이 씹어 먹고 길거리 변태를 맨손으로 때려잡으며 만나는 남자마다 진상이거나 하는 연애마다 암울했던, 그러나 막돼먹은 세상을 향해 굴하지 않는 패기를 보여준 영애는 대한민국 평범한 직장인 여성들의 등불이자 또 다른 자아였다. 그랬던 영애가 시즌 7에서 덜컥 장동건(이해영) 과장과 연애를 시작한 것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에 대한 보상이라 치자. 하지만 장 과장의 손을 잡은 채 훈남 동료 산호(김산호)의 고백을 듣는 영애라니, 우리 인간적으로! 어장관리는 하지 맙시다. 매일 술과 야근으로 밤을 지새우는 척 해놓고 이건 배, 배신이야 배신! 여기 매일 마감과 마감으로 밤을 지새우며 틈틈이 또 마감을 하는 사람이 그런 꼴을 보려고 시즌 8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글. 이가온 thirteen@
글. 이승한 fourte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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