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이 말 한 적 있던가? 고맙다. 니가, 고맙다고.” 세상에서 가장 수수한 고백이었다. KBS 에서 문재신(유아인)은 그렇게 김윤희(박민영)를 떠나보냈다. 성균관의 아웃사이더,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투사이자 연정을 품은 상대를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는 로맨티스트 재신은 성장통을 앓는 청춘의 상징 그 자체였다. 재신은 KBS 의 다정한 ‘아인 오빠’로 시작해 영화 의 방황하는 소년 종대, KBS 의 외로운 무사 흑산, 영화 의 씩씩한 파티셰 지망생 기범, KBS 의 ‘요즘 남자애’ 현규까지 유아인이 지나 온 청춘의 조각들과 또 다른 새로운 세계이기도 했다. 어느새 스물다섯, 거무스름하게 태운 얼굴에 수염을 길렀음에도 여전히 앳된 웃음을 지을 때마다 해사한 소년의 얼굴로 돌아가곤 하는 유아인을 가 만났다. 직접 지은 예명 ‘아인’이 독일어로 ‘하나(ein)’를 뜻하듯 자신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이 청년 안에 있는 수많은 우주를 따라 여행하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유아인에게는 분명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종영일에야 촬영이 끝났는데, 요 며칠 어떻게 지냈어요? 그동안 줄 서 있던 일정들로 바쁜 것 같던데요.
유아인 : 내내 술 마셨어요. 밤엔 일 안 하니까. (웃음) 그런데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촬영 때문에 일찍 일어나던 게 습관이 돼서 자꾸 일찍 일어나지는 거예요. 화나게. (웃음) 사실 많이도 아니고 반 병 정도만 마셔도 취하는데 그 상태로 계속, 죽을 때까지 마셔요. 그런데 이젠 밤 못 새고 새벽 두세 시쯤 되면 쓰러져 있다가 집에 오게 돼요. 앗, 그런데 왜 갑자기 술 얘길 이렇게 하고 있지…

“성균관 안에서 혼자 다른 재신이의 마음이 궁금했어요”

작품 얘기를 하죠. (웃음) 은 반드시 걸오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이 사람의 어떤 점에 끌렸던 건가요?
유아인 : 안에서의 재신이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성균관에서 다른 친구들과 떨어져, 은행나무에 홀로 올라가 있고 옷도 혼자 다르게 입고 머리도 다르게 하고 있는데 재신이가 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서도 세상과 단절되거나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게 아니라 성균관 안에서만 아웃사이더라는 게 신선했어요. 분명히 자기가 시험 치고 입학해서 들어온 공간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아이의 마음에 호기심이 생겼고 저와 좀 비슷하다고 느꼈죠. 성균관은 일종의 ‘학교’라고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유아인 : 그런데 성균관은 전 국민이, 우리가 다 다녔던 그런 학교가 아니라 조선 사회에서 진짜 엘리트 코스를 밟는 곳이었잖아요. 제가 알기론 정원이 5백 명도 안 됐고 졸업하고 나면 바로 정치에 뛰어드는,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보다 더한, 아마 로스쿨 같은 엘리트 코스?거기서 아웃사이더인 건, 그냥 우리 학교에서 창가에 혼자 앉아 먼 산 바라보는 애랑은 다른 거예요. (웃음) 보통, 엘리트 코스를 밟는 친구들이 그러기 쉽지 않잖아요. 그들은 너무 똑똑하고 주류가 되길 원하고 자기가 지금 어디 있으며 뭘 해야 하는지 아는 여우들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안에서 혼자 다른 재신이는 뭘까, 그 마음이 너무나 궁금했어요.

그런 재신을 연기해나가면서 발견하거나 느낀 건 뭐였나요.
유아인 : 후반으로 가면서 느낀 건 얘의 마음이 너무 어린 아이, 진짜 꼬마라는 거였어요. (웃음) 그래서 감정 표현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직설적이면서도 툭툭 내뱉는 성격을 조절하기가 힘들었어요. 윤희(박민영)와의 러브라인으로 가면서는 너무 안으로 파고들지 않았나 싶고. 본래 여주인공 캐릭터들이 눈치가 없기도 하지만 저도 한평생 하도 러브라인이라는 게 없어 놔서. (웃음) 19부에서 선준(박유천)이 있는 감옥 앞에 윤희를 데려다주면서 혼자 보고 오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때 고민이 많았어요. 이 행동은 재신이의 일부일까, 혹은 러브라인에서 뒤로 빠져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설정일까에 대해 감독님과도 얘기를 많이 했죠.

사실 재신의 윤희에 대한 감정은 무엇일까 계속 궁금하기도 했어요.
유아인 : 윤희는 재신이가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기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잖아요. 난 항상 세상을 등지고 성균관 애들을 다 똑같은 애들로 치부하고, 그들이 내게 선입견을 가진 것처럼 나 또한 그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윤희라는 당돌하고 재밌고 흥미로운 인물을 만나면서 변화한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감정이 생기고 여자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래서 나중에도 이 아이가 가진 눈빛과 예쁜 마음을 지켜주고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을 더 크게 가지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원작에서나 드라마에서나 윤희의 운명은 선준이와 짝지어지는 거니까, 그렇게 짜여 있는 결과에 어느 정도 맞춰서 오빠같이 지켜주고 싶어 하는 감정으로 간 거죠. “이 끝난 건 후련하면서도 아쉬워요”
은 로맨스 뿐 아니라 인물들 각자의 성장이 중요한 뼈대가 된 작품이었는데 재신에게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형의 죽음 이후 줄곧 원망해온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보다 제가 더 아프다고 까불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더 형을 사랑한다 자신했습니다. 그것도 잘못했습니다.” 라고 눈물짓던 장면이었어요.
유아인 : 재신이가 가장 아이 같다고 느낀 부분은 표현 방식이 너무 서툴고 자기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거예요.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자기 안에 갇혀서 ‘나보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없어.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어. 내 고통이 최고야’라고 여기는 건데, 사람들은 의외로 그런 고통이나 슬픔, 아픔을 가지고 더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물론 재신이 그렇게 많이 성장했다고 느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남들이 열 계단 올라갈 때 한 계단을 올라가는 게 힘든 아이였기 때문에 그 한 계단의 의미가 큰 거죠. 재신이가 자기를 둘러싼 벽을 깨고, 내 상처가 다가 아니란 걸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눈물로 얘기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아주 큰 걸음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과정에서 구현해내기 어려운 감정이 있었다면 어떤 건가요.
유아인 : 대사례가 시작되던 7부 엔딩에 나타나 “머릿수 채우러 왔다”고 하는 장면에서 웃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저는 모든 작품에서, 심지어 너무 슬프고 아픈 인물을 연기할 때조차 잘 웃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웃어야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대본을 촬영 1, 2주 전에 받았는데 거울보고 계속 이렇게도 웃어보고 저렇게도 웃어보고 별 생각을 다 해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물론, 예쁘게야 웃을 수 있지. (웃음) 하지만 그냥 그렇게 웃고 끝내는 게 아니라 대사에서 웃음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고리를 찾고 싶었어요. 결국 촬영하고 재촬영까지 했는데도 아직 100% 온전히 찾았다고는 못하겠어요.

모든 순간에 몰입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편인 것 같아요.
유아인 : 대사를 하거나 표정을 짓게 되거나 하는 데 있어 이유가 다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하게 되는 것들이 많거든요. 무의식적으로 대사를 치고, 무의식적으로 웃고, 무의식적으로 눈빛 한 번 쏘고. (웃음) 아, 그건 무의식적이 아니라 아주 의식적이죠. 기술적인 거고, 물론 그런 걸 원하시는 분들도 있고 그렇게 하면 저도 편해요. 피곤할 때는 ‘이유는 무슨, 그냥 OK 나겠지’ 하면서 연기하는 부분도 어느 정도 있고, 그런 면에서 이 끝난 건 후련하면서도 아쉬워요. 재신은 제가 완벽히 구현해 낸 캐릭터는 아니었으니까 좀 모자라지 않았나 싶고. 그러고 보니 영화 도 “훌륭한 소년이 될 거예요?”라는 질문에 싱긋 웃으면서 끝이 났어요. 분명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땐 어떤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유아인 : 모르겠어요. 그냥, 의 종대는 뭔가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과정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캐릭터에요. 내가 종대고, 종대가 나고.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어떤 말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대답하며 웃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그건 내가 웃은 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호흡과 말과 표정들이 진짜, 내가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는 진짜배기였던 거죠. 아무 생각 없이 한 거니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그게 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연기인데 조금씩 뭔가를 만들어가고 때가 묻어가는 배우로서 그 때만큼의 진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을 하면서 연예인에 대한 선입견이 깨졌어요”
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 다시 그 ‘진짜’에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유아인 : 그럼요. 항상 그렇게 노력해왔고. 하지만 사극이라는 장르는 틀림없이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해요. 내 말투가 아닌 말투를 써야 하고 평소 입을 일 없는 옷을 입어야 하고, 이미 모든 상황 자체가 설정인 현장인데, 특히 KBS 때 많은 난관에 부딪혔어요. 나는 정말 무능하고 여기 어울리지 않는 애구나, 나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다가 아니고 그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 전까지는 ‘기술적’이라는 걸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온전히 내 몸에 배게 되면 도리어 더 자연스럽게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 경험이나 배움이 에서는 어떻게 작용했나요.
유아인 : 재신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제일 부족하다고 느낀 게 발성이에요. 감정을 보여주는 연기에의 내공을 떠나 발성은 배우로서 아주 기본적인 소양인데 내가 다른 소리를 내고 싶어도 목과 호흡의 한계에 부딪혀서 그 안에서만 내야 했던 소리들이 있거든요. 그건 단순히 소리만이 아니라 캐릭터의 폭을 더 키울 수 있는 부분인데도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워요. 발음이나 발성은 예전부터 많이 노력해서 고쳐왔다고 들었어요. 데뷔작인 에서 옥림이(고아라) 아빠 역의 강석우 씨가 딸의 남자친구인 ‘아인 오빠’를 못마땅해 하면서 “그 자식은 혀가 짧은 거야, 긴 거야?”하고 꼬투리 잡는 장면이 재미있었거든요.
유아인 : 당시엔 혀 짧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웃음) 사실 지금도 많이 좋아졌다기보단 대사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부터 그런 지적을 덜 받은 것 같아요. 발음은 지금도 별로 좋지 않아요. 웅얼웅얼 거리거든요. 그런데 기술적으로는 대사를 톡톡 찍어서 하는 게 아니라 말을 뭉뚱그리기 때문에 괜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죠. (웃음)

이번 작품에서는 네 명의 주연배우가 다 비슷한 또래였는데 동년배들과 작품을 같이 한다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요.
유아인 : 저도 선입견이 있었어요. 보통 사람들이 ‘연예인은 이럴 것이다’라고 갖는 생각, 그래서 연예인이랑 가까워지질 못해요. (웃음) 실제로 좀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내 감정이 최고고 내가 더 주목받아야 한다는 마음, 저도 알죠. 그런데 유천이를 통해 아이돌, 한류스타에게 가졌던 선입견이, 민영이를 통해 또래 여배우에게 가졌던 선입견이, 송중기라는 사람을 통해 이 여우같아 보이는 배우에게 가졌던 선입견이 아주 많이 깨졌어요. 그래서 내가 이 사람들을 예쁘게 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긴 건 재신이가 윤희와 선준, 용하를 받아들이며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내 자신의 성장이기도 하죠. 재밌게 찍었고, 지나고 보니 아쉬운 건 연기에 대해 더 솔직한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한 거예요. 그래도 중기 형이 많이 고마운 건 여러 가지 조언들을 편안하게 해 줬다는 점이에요. ‘이 사람, 그냥 여우가 아니라 잘 하기 위한 여우구나’ 라는 걸 알게 됐죠.

스타일리스트. 지상은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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