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이 시작을 알릴 무렵, 이 드라마에 주목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MBC 와 SBS 가 팽팽한 대결구도로 시청률을 양분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름이면 관성처럼 찾아오던 구미호라니. 시청자들을 사로잡기에는 너무 익숙하거나 구태의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기분 좋게 배신당했다. 은 더 이상 에 살고 있는 구미호를 내세우거나 여인에서 여우로 변신하는 구미호의 CG로 승부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캐릭터를 위한 캐릭터와 튀는 설정만이 난무하는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16회를 밀고 나간 드문 드라마였다. 이번 주 FOCUS는 익숙하게 다가와 새로움을 남기고 종영한 을 위해 준비했다. 연이와 정규 도령의 가슴 아픈 첫사랑과 구산댁의 절절한 모정, 그리고 만신의 대반전까지 아직 드라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당신을 위해 이 이룬 성취와 작가들의 인터뷰, ‘여우누이’가 이전의 구미호와 어떻게 다른지 꼼꼼히 정리했다.

KBS 에서 간을 탐하는 것은 구미호가 아니라 인간이다. 여기서의 구미호는 공포보다는 연민의 대상에 가깝다. 구미호 모녀는 인간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고, 계급적으로는 천민에 가까운, 전형적인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자다. 보름달이 뜨면 숨길 수 없는 털과 꼬리가,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나지만 대개 그런 순간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기보다는 구미호 스스로 위기에 빠져있는 경우이기 쉽다. 무리가 같이 돌아다니지 않으므로, 연대할 대상도 없다. 산에 가면 호랑이가 위협하고, 마을에 내려오면 인간이라는 더 무서운 적이 버티고 있다. 최근에는 부진했지만 오랜 세월, 여름이면 시청자를 공포에 떨게 하던 구미호의 처지가, 이렇게 애달플 수가 없다. 무서운 타자로서의 구미호를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뒤바꿔 놓은 의 전복적 상상력은, 한국의 드라마에 부재했던 다양한 해석의 창을 여는 한편 지금, 여기의 현실에 복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와 다른 타자들의 비극구미호 모녀 즉 구산댁(한은정)과 연이(김유정)는 윤두수(장현성) 일가에 우연히 찾아든 외부인이다. 구산댁 모녀는 아름다운 외모, 그에 못지않은 심성으로 단박에 사람들의 환심, 그리고 시기를 산다. 구산댁은 각종 약재에 밝고, 연이(김유정)는 그림에 능하다. 윤두수와 천우(서준영), 조정규(이민호)가 이 모녀에게 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잘 모르는 존재에게 느끼는 어떤 경외감,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감정은 기묘하게도 사랑에 빠질 때의 그것과 유사하다. 아마도 드라마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이었을 정규와 연이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그 감정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하게 되며, 그(그녀)가 원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연애감정은 그 자체로 소년 소녀의 성장담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관계 맺기가 아닌 집단으로서의 관계, 그것도 집단에 속하지 않는 외부자와의 관계가 항상 이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내부에 치명적인 문제와 위기(초옥의 괴병)가 생길 경우 대체로 그 원인과 책임은 대부분 ‘우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약한 존재들이 지게 되어있다. 간단하게 말해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윤두수 일가에 의해 연이는 간을 잃고, 구산댁은 연이를 잃게 된다.

지금, 여기의 환부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

얼마간의 망설임이 있다고는 해도, 윤두수는 ‘딸과 다름없다’던 연이를 죽이고 그 간을 취하고, 양부인(김정난)은 그 간을 냉큼 받아 초옥(서신애)에게 먹이는데 주저함이 없다. 만신(천호진)의 계략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근본적으로 내 자식을 살리고자 남의 자식을 살해하는 행위의 주체였다는 점에서 이들 부부의 죄는 무겁기 그지없다. 더 무서운 것은 윤두수부부가 보여주는 감정 변화의 추이다. 그들을 떨게 하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사실이 알려질까 싶은 두려움이다. 죄책감은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초옥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반복적 자기 합리화는 스스로의 저지른 잘못을 쉽게 은폐시킨다. 창졸간에 귀한 딸을 잃은 구산댁을 불쌍하게 여기 긴 커녕,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놓는 패악을 저지른다. 뒤늦게 구산댁 모녀의 정체가 드러나자, 그들은 금수이고 미물이므로, 죽어 마땅하다는 간편한 논리를 펼치는 한편, 모든 것이 구미호가 저지른 해괴한 짓이라는 책임전가에 급급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의 구미호는 전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인간의 목숨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허기를 느낄 때 쌀을 먹고도 생존이 가능할 만큼 사회화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인간과의 근본적인, 생물학적 차이가 강제적으로 폭로되면서, 그들이 인간과 공존하기 위해 애썼던 모든 노력은 깡그리 무시된다. 이런 구조는 사회의 모든 성적, 종교적, 지역적, 인종적 소수자가 겪는 차별의 프레임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다르다는 것이 차별의 정당한 근거가 되는 사회는, 사실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여기의 환부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바로 의 현재적 의의다.

한국 드라마에서 실종된 질문, 다시 돌아오다

은 스릴러 혹은 호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잘 만들어진 가정비극이자 복수극이기도 하다. 딸을 잃은 구미호의 폭주가 시작되었을 때 이 복수극은 간단히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원한은 더 큰 원한을 불러왔다. 내 자식을 죽였으니 네 자식도 죽이겠다는, 수긍은 가지만 끔찍한 마음은 곧바로 내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대를 이은 복수로 이어진다. 연이의 영혼이 빙의된 초옥은 제 애비(윤두수)를 칼로 찌르고, 양부인은 구산댁을 찌르려다가 초옥을 베고 만다. 외견상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끔찍한 장면이다. 복수의 최종적인 칼끝은, 결국 스스로를 향하게 된다는 냉정한 전언이야말로, 절대적인 악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개운한 복수극과 의 차별화시키는 지점이다. 연이를 잃고 윤두수 일가를 파탄에 몰아넣으려는 구산댁의 눈빛이나 엄마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초옥의 눈빛은 다르지 않다. 복수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구산댁에 감정이입이 되다가도, 믿었던 남편의 칼에 맞아 죽는 양부인도 측은하다. 이른바 복수의 딜레마다. 은 결국, 모두가 죽고 다친 결말에서, 원수의 아이를 제 자식처럼 품은 구미호가 스스로 택한 죽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의 모성은 그렇게 감정의 양극단을 설득력 있게 오갔다. 결국 내 자식만 구하려던 인간의 모성을 초월한 것은 남(원수)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돌봤던 여우의 모성이었다. 실로 전대미문의 모성애다.

은 막판의 다소 늘어진 전개와 비극을 총 지휘한 만신의 동기와 배경에 대해 다소 미흡했던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드물게 단단한 내러티브 안에서 최근 드라마에서 실종된 ‘질문’을 줄줄이 불러 세웠다.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식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항상 타당한가?’ ‘복수 뒤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이야기는 없고 설정만이 남은 드라마, 피가 도는 캐릭터가 아닌 입력대사를 출력하는 기계 같은 캐릭터가 돌아다니는 그렇고 그런 드라마의 홍수 속에, 은 현재적 고민을 담고, 상상력은 비틀고, 서사와 캐릭터는 뚝심 있게 일관성을 지켜내고, 배우들의 호연을 덧씌웠다. 특히 서신애, 김유정 두 어린 배우들의 연기는,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다. 그리하여 더운 여름의 끝에, 우리는 우연히 받아든 선물처럼, 2010년 한국 드라마의 예기치 않은 성취를 목격한 것이다.

글. 조지영(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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