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은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는 배우다. 코믹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이목구비도 그렇지만 그가 출연한 작품마다, 배역의 경중에 관계없이 관객은 그의 캐릭터를 잊지 못한다. 의 경찰, 의 칼잡이, 의 육갑, 의 고광렬, 의 김덕천까지 그는 수많은 인상적인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들이 인상적일 수 있었던 데는 유해진의 연기가 적지 않은 작용을 했는지도 모른다. SBS 의 김두수 역시 그를 통해 진저리가 쳐질 만큼 지독한 악인으로 되살아났다.
하지만 유해진은 그 강렬한 캐릭터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배우다. “한번 강한 캐릭터로 인상이 남고 나면 그 비슷한 느낌을 원해서 저를 캐스팅하려는 경우도 있어요. 배우로서 썩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캐릭터가 들어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스스로 그 안에서 변화를 조금씩 줘 보려고 하는 거죠.” 천호진과 그가 공동주연을 맡은 영화 에서도 그는 필사의 연기를 선보인다. 사고로 뇌를 다쳐 정신병원에 입원한 ‘박상업’은 그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수많은 양아치들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여전히 낯선 남자다. 침대에 온 몸을 묶인 채 서로를 죽이기 위해 몸부림치는 두 남자의 모습은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기이하며 때로는 섬뜩하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2인극, 부조리극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병실 침대의 앞쪽에서는 관객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이 작품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감정이든 설정이든 매번 결코 만만치 않은 작품들을 선택할 때마다 “내가 안 하면 딴 사람이 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못할 건 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는 배우 유해진은 사실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 사뭇 다르게 진지하고 섬세한 남자이기도 하다. “아유, 참, 이런 게 참 말하기 어려운 건데… 낭만은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점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영화를 보러 가는 행위 자체가 낭만적이고, 약간 감정적 사치라는 기분도 즐길 수 있잖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의 공통점을 ‘낭만’으로 꼽으며 그가 웃었다.
1. (In The Mood For Love)
2000년 | 왕가위
“좋아하는 영화를 말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사실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봤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심지어 스토리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저한테 중요했다면 쫘악 기억이 날 텐데 그보다는 영화의 색감, 음악, 카메라 앵글 같은 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양조위와 장만옥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카메라가 꼭 그 두 사람을 비추지 않고 저 쪽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보거나 사물을 찍기도 하는데 그 느낌이 참 좋았어요. OST에서는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를 좋아해요.”1962년 홍콩, 지역 신문의 편집장 차우(양조위)는 부인과 함께 상하이 주요 거주 지역의 새 집으로 이사한다. 그는 곧 이웃에 새로 이사 온 리춘(장만옥)과 그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출장이 잦은 리춘의 남편과 집을 종종 비우는 차우의 부인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도 늘어나고 그들은 곧 친한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 (Three Colors: Blue)
1993년 |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시리즈를 다 좋아해요. 이런 영화 스타일에 굉장히 빠져 있었던 때가 있거든요. 그 중에서도 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제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아요. 음표 위에 손가락을 올리면 소리가 나고, 물방울이 튀고, 카메라가 아웃포커싱 되고 하는 이미지들이 굉장히 감각적이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요.”
음악가였던 남편과 어린 딸을 교통사고로 잃은 줄리(줄리엣 비노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고통과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방황한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차단한 채 가끔 죽음과 같은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견디던 줄리는 어느 날 남편에게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찾아가 보기로 결심한다. 1993년, 폴란드 출신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프랑스-폴란드의 합작으로 만든 ‘세 가지 색’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 프랑스 국기의 삼색에서 따온 제목 , , 는 각각 각각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의미한다.3. (Les Amants Du Pont-Neuf)
1991년 | 레오 까락스
“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생짜’라서인 것 같아요. 남녀 주인공을 맡은 드니 라방하고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도 워낙 좋은데, 영화 전체적으로 야생의 느낌이 강하다는 게 되게 좋았어요.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그렇고 사랑도 정말 꾸미지 않은, 날 것 같은, 아주 그냥 원초적인 감정 있잖아요.”
화가였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걸인처럼 거리에서 살아가는 미쉘(줄리엣 비노쉬)과 곡예사 알렉스는 파리 세느 강의 아홉 번째 다리인 퐁네프다리에서 만난다. 다리와 거리에서 함께 지내던 알렉스는 미쉘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미쉘은 실명하기 전 사랑했던 줄리앙에 대한 기억만을 붙잡고 살 뿐이고, 그럴수록 알렉스는 미쉘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레오 까락스의 데뷔작 와 에 이어 드니 라방이 모두 ‘알렉스’라는 이름으로 출연해 ‘알렉스 청춘 3부작’이라 불리기도 한다.
4. (Crimson Pig)
1992년 | 미야자키 하야오
“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느껴져서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가끔 집에서 혼자 돌려 보는 부분이 있는데, 붉은 돼지가 그 낡아빠진 비행기를 촤악 몰고서 석양이 지는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면 레스토랑에서 샹송이 흘러나오거든요.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뭔지 모를 낭만이 느껴지는 장면이에요.”1920년대, 이탈리아의 무인도에서 혼자 살며 프리랜서 비행기 조종사로 활동하는 포르코 로소(붉은 돼지)가 주인공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마르코지만 제 1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자신을 비롯한 인간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스스로 돼지로 변해 군대를 떠나 하늘의 해적을 소탕하며 현상금으로 생활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중년의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자전적 작품으로 반파시즘과 무정부주의적 시선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5. (Per Qualche Dollaro In Piu)
1965년 | 세르지오 레오네
“저는 서부영화를 보면 외숙모가 생각나요. 집이 청주인데 어릴 때 여름 방학이 되면 서울 외가에 많이 놀러갔거든요. 조그만 반지하에 사셨으니까 제가 놀러가는 게 썩 반갑지 않을 만큼 어려운 형편이셨는데 그래도 조카 올라왔다고 오뎅 무침 같은 것도 해 주시고 밤이 되면 모기장이 어른어른하는 저 쪽에 텔레비전을 놓고 를 봤어요. 외숙모가 서부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보셨는데 독수리가 하늘에 딱 뜨면 “또 누구 죽겠네” 하고 예측하실 정도였어요. (웃음)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EBS에서 이 영화를 해주는 걸 보고 외숙모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산적 두목이자 은행 강도인 현상수배범 인디오(지안 마리아 볼론테)가 감옥을 탈출해 부하들과 함께 살인과 강도 행각을 벌이고 다니자 그를 잡기 위해 서부의 작은 도시에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차갑고 냉정한 총잡이 ‘이름없는 자’(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몰티머 육군대장(리 반 클리프)다. 이들은 힘을 합쳐 인디오를 잡기 위한 음모를 꾸미지만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으로 큰 인기를 끈 의 속편이다.
사실 그동안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 가운데는 ‘상스러운’ 인물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비겁하거나 욕망에 충실하거나 잔인한 이들을 연기하는 유해진은 말한다. “소위 말하는 ‘양아치’ 역이 들어오면 또 이렇게 거친 사람을 연기해야 하는 거부감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한편으로 그 인물에 대해 동정심이 생겨요. 물론 도덕적으로는 나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게 하나의 삶이고, 그 사람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뭔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는 거예요. 물론 그 인물이 주인공이 아닐 경우에는 영화가 거기까지 디테일하게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연기하는 저라도 그 사람의 ‘생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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