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트한 티셔츠와 청바지. 사람들 가득한 청담동의 어느 프랜차이즈 커피숍 구석 자리에 앉아 취재팀을 맞은 김갑수의 옷차림이다. 캐주얼을 입고, 약간은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이게 사진이 잘 나올까? 허허” 하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냉혹한 권력욕을 포커페이스 안에 감춘 KBS 의 인조나 사랑과 배려의 화신이었던 KBS 의 구대성 사장의 포스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종종 의성어로 표현하자면 ‘껄껄’과 ‘허허’의 중간 즈음에 있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연기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어떤 정색이나 엄숙함의 순간 없이 허락된 인터뷰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재밌게도, 그 부담 없는 시간 안에서 그가 했던 말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건, 그 날의 대화를 다음의 글로 옮기면서다. 어쩌면 배우 김갑수의 진정한 포스와 내공을 보여주는 건, 이웃집 아저씨처럼 심각하지 않은 태도로 삶과 연기에 대해 말하던 캐주얼한 티셔츠의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재밌게도 최근작인 SBS 과 KBS 모두 죽음으로 퇴장했다.
김갑수 : 우연찮게 에선 화요일에 죽고, 에선 그 다음날 수요일에 죽었다. 이렇게 동시에 죽는 것도 처음 있는 경험이다.

“존재감 없는 역할은 잘 안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있었나.
김갑수 :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10회까지 하고 죽기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죽는 건지만 몰랐고. 같은 경우에는 아예 몰랐다. 대체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 건가 싶었는데 죽더라. 대본 보면서 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데 뭐 드라마 거의 끝까지 간 거지. 혹 자신이 동화됐던 인물이 죽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김갑수 : 아, 가슴 아프거나 그런 건 없다. 전에도 다른 작품을 통해 많이 죽어봤으니까. 중요한 건 그것이 드라마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에서는 독립운동의 선구자로서 후대를 위해 사형을 당한 거고, 에선 믿었던 기훈(천정명)을 오해하며 충격을 받아 죽는 건데, 그 상황에선 그게 당연하지 않나. 분명 인물이 죽는 게 살아있는 것보다는 좀 힘든 일이겠지만 요즘은 그 인물이 어떻게 죽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죽음의 효과가 드라마 안에 있어야지.

심지어 그 죽음이 앞으로의 상황까지 지배했다. 의 유희서가 자신의 뜻을 남은 사람들에게 남겼다면, 의 구대성은 아예 죽은 뒤에도 회상 신으로 계속 등장했다.
김갑수 : 그게 또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됐다.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왜 나를 가지고. 허허. 내가 회상 신 때문에 촬영장에 갈 때마다 그랬다. 왜 자꾸 날 이렇게 부르냐고. 그래도 현장에서 부르면 가야지. 허허.

말하자면 드라마라는 전체 그림 안에서 굉장히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건데 그런 지점에 대한 욕심이 있는 건가.
김갑수 : 당연히 있지, 당연히. 나는 어떤 역을 맡을 때 존재감이 없으면 잘 안 한다. 드라마에서 몇 회만 출연하고 죽는 건 상관없다. 다만 작품 안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남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KBS 같은 경우도 단 2회 정도만 나갔지만 그 분량이 드라마 안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골랐던 거다. 이런 질문을 한 게, KBS 의 인조처럼 짧지만 강렬한 인상의 연기들이 많다. 그게 단순히 연기력의 문제인지, 역의 선택부터 고려한 건지 궁금했던 거다.
김갑수 : 그런 역할을 찾는다. 분량 상 자주 나오더라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인물에는 매력을 못 느낀다. 그래서 안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맡게 되는 역할들이 좀 어렵지. 준비도 많이 해야 하고. 그래선지 감독들도 항상 나보고는 중요한 역할이니 같이 하자고 한다. 허허허허. 같은 경우에도 김규태 감독과 아는 사이인데, 그가 정말 중요한 역할이니 짧아도 나와 달라고 했다. 어려운 역할들이 많지만 그게 재밌는 거 같다. 그런 인물을 통해 시청자들과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대본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게 배우의 역할”

그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SBS 의 아귀였다. 드라마에서 거의 일관되게 자신의 욕망과 하는 바를 일치시키는 인물은 그뿐이었다.
김갑수 : 아귀의 경우에는 악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연기를 했다. 그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처럼 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지, 무조건적인 악인은 아니다. 가령 전쟁은 나쁜 것이고, 누구를 죽이는 건 나쁜 건데, 그 상황에 떨어졌을 땐 그게 나쁜 짓인지 따지지 않고 행동하지 않나. 아귀 역시 마찬가지다. 노름은 무지하게 나쁜 거지. 하지만 적어도 노름을 하게 된 이상, 그 세계에서 최고가 되려면 아귀와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속이고 배신하고 빼앗으면서.

그렇다면 혹시 시놉시스나 대본 단계에서 이해가 되지 않아 맡지 않은 인물도 있나.
김갑수 : 음… 그런 적은 없는 거 같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작가가 분명 작품을 쓸 때에는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인물을 창작한다. 말도 안 되는 인물이라는 건 없다. 물론 그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표현하다가 어느 순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장면이나 ‘응? 왜 이러지?’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걸 작가의 탓으로만 돌릴 건 아니라고 본다. 그 인물이 그럴만하다는 걸 연기로서 메우고 공감가게 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지 않나.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완벽한 작가라는 게 어디 있나. 그걸 메우기 위해 연출이 노력하고 배우가 노력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메워가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거지. 시청자에게 보이는 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종의 결과물인 거고. 그런 면에 있어서 본인의 노력 외에도 연출자나 작가와의 피드백이 중요할 거 같은데.
김갑수 : 전에는 그런 얘기도 많이 하고 감독과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연기할 때 감독이 요구하는 거에 맞춰가는 편이다. 좀 더 중요하거나 힘든 부분에 한 해서 ‘괜찮았어? 내가 한 게 맞는 거야?’라고 물어보고. 안 맞는다고 하면 다시 하면 되니까. 그렇게 많이 물어보진 않지.

이제 현장에선 거의 최고참일 텐데 혹 사람들이 본인의 말을 어렵게 여길까봐 걱정하는 부분은 없나.
김갑수 : 그런 건 없다. 왜냐면 내가 밖에 나가면 말도 잘하고 감독들도 편하게 해주니까. 선배라고 다른 연기자들에게 크게 부담주고 그러진 않고. 실수하면 다시 찍으면 되는 거지.

실제로 지금 의상도 그렇고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굉장히 편한 느낌이다. (웃음)
김갑수 : 나는 젊은 배우들과 나의 차이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연기자로서 천정명과 내가 다를 게 뭔가. 허허허허. 배우로서 나도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데, 뭐. 물론 좀 다르긴 다르지. (천)정명이가 어리고, 나는 배도 많이 나왔고.

글. 위근우 eight@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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