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이 끝났다. 김주원(현빈)과 길라임(하지원)의 영혼 체인지와 기억상실, 계급 차이를 모두 뛰어넘은 사랑의 기적을 가장 고전적인 형식과 가장 현재적인 방식으로 제시한 은 많은 이들의 주말 저녁을 위로했다. 이제 그 많던 시청자들은 무엇으로 다가오는 월요일의 비극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김주원의 눈물과 오스카의 깨방정을 잊지 못하는 당신께 의 마지막에 관한 가장 확실한 보고서를 권한다. /편집자주
의 김주원(현빈)은 길라임(하지원)을 만나자 마자 사랑에 빠진다. 물론 그게 사랑이라는 걸 인정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건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 광속의 속도로, 시청자들 또한 에 빠져들었다. 20부작 드라마에서 1부 40분이 지나갈 때쯤 이미 주원은 라임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애절하게 슬픈 발라드까지 흘렀다. 이런 스피드로 나머지 19부작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려가 자주 현실이 되기도 했고 최종회의 성긴 밀도가 아쉬움으로 남지만, 결과적으로 작가의 모험은 성공으로 끝났다. 은 드라마의 전반부인 4부까지, 캐릭터의 매력과 약점을 튼튼하게 자리잡고, 이야기의 개연성 사이로 촘촘한 은유와 복선의 씨뿌리기를 마쳤다. 이후로는 단단한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화음만으로도 이야기는 저절로 흘러갔다.
뻔함과 신선함 사이의 절묘한 균형
의 설정이 사실상 낡고 익숙한 틀을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선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캐릭터와 배우들의 호연, 그리고 능숙하게 변주되거나 전복되던 전형성 때문이었다. 생생한 캐릭터의 힘은 주요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조연들에게도 두드러졌다. 박상무(이병주)나 문분홍(박준금)-문연홍(김지숙)자매, 김비서(김성오) 같은 배역들은 대기업이 배경으로 나오는 드라마에서 뻔하게 소비될 수 있는 역할이지만, 에서는 그런 뻔함을 정면에서 비꼬거나 한 발자국 먼저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영리하게 우회해나갔다. 한류스타 오스카(윤상현)마저 종종 아줌마의 영혼이 빙의된 듯 천연덕스러웠다. 기억상실 코드 역시 뻔하게 이용되지만, 전반부 뿌려놓은 캐릭터의 깨알 같은 씨앗을 가볍게 쓸어담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전복의 클라이맥스는 길라임이 ‘아드님, 저 주십시오’를 외치는 장면이 아닐까? 부자 남자의 엄마가 내미는 돈봉투 혹은 물컵과 독설을 속수무책으로 눈물로 받아내는 가난한 여주인공들의 비련을 뛰어넘어서, ‘당신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선언하는 그 장면이야 말로, 통쾌한 전복이었다. 기적을 기다리고,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사실상 은 명백한 계급 판타지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안 가진 게 없는 주원과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라임의 결합은 실현이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주원이었고, 그가 제시한 해법이 였다. SBS 에서 계급간 이동이 불가능하다며 강인욱(소지섭)이 이수정(하지원)에게 빌려준 책이 무려 그람시(Gramsci)의 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수정은 여러 번 를 읽어내려 애쓰지만 ‘헤게모니’라는 말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그 책은 해독 불가의 영역에 있었다. 그러나 의 해석은 어렵지 않다. 심지어 각색도 쉽다. 따지고 보면 논란이 많았던 영혼 바꾸기 설정도 를 현실로 불러내기 위한 세팅이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한 남자의 사랑이 마침내 불러온, ‘사랑의 기적’은 나 의 엔딩과도 비견된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오직 유일한 힘, 종종 지구와 인류를 구하던 사랑의 힘은 마침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목숨을 던지게 만들고, 식물 인간을 번쩍 일어나게 만든다.
은 그래서 그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달콤하게 코팅된 당의정 같은 드라마였다. 역설적으로 의 계급간 사랑은 남녀의 영혼이 바뀌는 ‘기적’ 정도는 일어나줘야 실현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잔인한 현실 인식에서 달콤한 사랑의 동화가 펼쳐진 셈이다. 거의 모든 시청자들이 염원하던 대로, 동화의 마무리는 예뻤다. 어리둥절할 만큼 과도하게 예뻤다. 결말의 아쉬움이 오래도록 회자될 수도 있겠지만, 꼭 계급간의 사랑만이 아니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일이, 어느 정도까지는 운명 혹은 기적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은 꽤 보편적인 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사랑했던 의 주요한 장면들은, 주원이 라임을 향해 끝없이 쏟아내던 구애의 말들, 초조한 표정들이 살아있던, 애닯고도 절실했던 마음의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적이 닿아있던 곳은, ‘신비 가든’의 꽃술이 아니라, 바로 그런 작은 순간들이었다. 확실하다.
글 조지영
‘비밀의 정원’은 결국 사랑에 대한 은유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찾아오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감정이지만, 그것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우주의 비밀 못지않게 불가해한 신비와 아이러니의 대상. 은 그것을 “의학으로도 밝히지 못한 영역”인 ‘기적’ 혹은 ‘마법’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애초에 김은숙 작가의 로맨스 장르에 대한 자기반영적 변주로 보였던 이 드라마는 사실 이 장르의 가장 근본적이고 고전적인 질문을 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자 그 답을 탐색하는 여정과도 같은 드라마다.영혼 체인지, ‘완전한 하나’에 대한 판타지
그래서 이 드라마는 수많은 의문문으로 채워져 있다. 주원(현빈)과 라임(하지원)의 만남부터가 “오스카 알아?”라는 물음과 오해에서 시작되며, 그 이후의 전개는 한마디로 ‘나는 대체 왜 당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동어반복적 질문의 연속이다. 가령 자신도 모르게 라임에게 끌리게 된 주원은 묻고 또 묻는다. 오스카(윤상현)에게 “학력도 별로고 어휘선택도 거칠고 가끔 폭력도 쓰고 그런 여자랑 사귀어봤냐”고 묻고, 지현(유서진)에게 “상사병은 증상이 어떤” 거냐 물어본다. 심지어는 라임에게조차 “나 같은 사람이 댁 같은 여자 좋아하는 거 봤어? 현실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며 따지다가 스스로 “나는 지금 딱 미친 놈”이라 결론 내린다.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아무것도 아닌 저 여자와 있는 모든 순간이 동화가 되는 걸까” 자문하기도 한다. 주원을 비롯한 의 인물들에게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난해한 미스터리 그 자체이며, 사랑하는 이의 “진심”은 지금 이 순간 가장 해독하고 싶은 비밀이다. 그래서 주원은 꽃점에 의지해서라도 라임이 과연 연락을 해 올 것인지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하고, 라임은 주원과 같은 책을 읽어서라도 그의 마음을 엿보려 한다.
에서 주원과 라임의 영혼이 뒤바뀌는 설정은 그렇게 서로의 진심에 도달하고 싶어 하는 모든 연인들의 판타지에 대한 즉물적 표현과도 같다. 그것은 “내가 봤던 걸 그쪽도 봤으면 좋겠어. 내가 서있던 창가에 네가 서있고 내가 누웠던 침대에 네가 눕고 내가 보던 책들을 네가” 보기를 바라고, 결과적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다. 꼭 거울을 보듯 상대방에게서 나와 똑같은 모습을 발견하는 상상. 극중 주원과 라임이 서로의 분신처럼 발을 맞춰 걷고 액션 연습을 하며, 마침내 마지막 회에서 한 몸으로 겹쳐진 채 산책을 하는 모습은 그러한 판타지를 그대로 시각화한다. 주제곡인 ‘그 여자’가 ‘그 남자’로 짝을 맞추고, ‘한 남자’가 ‘한 여자’로 영혼의 한 쌍을 형성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처럼 이 영혼 체인지를 통해 보여주는 궁극의 판타지는 모든 경계와 장벽을 초월한, 양성구유의 완전체였던 사랑의 원형적 신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기억 상실 모티브,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판타지
‘기적’이자 ‘마법’인 사랑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모티브는 기억 상실이다. 영혼 체인지가 불완전한 존재들이 온전해지는 판타지였다면, 기억 상실 모티브는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판타지다. 영화 이 그러했듯이 기억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사랑은 로맨스물의 근본적 판타지 중 하나다. 은 기억 퇴행 뒤에도 주원이 라임에게 이끌리는 모습을 통해 또 한 번 사랑의 운명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특히 영혼 체인지의 마지막을 연인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꾸는 지순한 순정으로 그렸던 것처럼 기억 상실 모티브에도 운명적 무게를 더하며 사랑의 절대성을 강화한다. 13년 전 사고에서 주원을 구해준 이는 라임부친이었고, 그 봉인된 기억 속에서 라임과의 운명적 첫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은 바로 라임에 대한 기억 상실이었다.
그리하여 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엔딩신으로 선택한 의 마지막 회는 이 모든 “마법의 시작이자 끝”인 순간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한 해피엔딩의 ‘기적’ 안에 위치시킨다. 결국 장르의 관습을 뒤틀어 계급에 대한 현실인식이나 남녀의 진정한 성장을 그리려던 의도 대신 이 장르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판타지로 돌아온 것이다. 의 진정한 목표는 스스로 ‘신데렐라’나 ‘인어공주’처럼 사랑의 한 원형에 대한 동화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글 김선영
글. 김선영(TV평론가)
글. 조지영(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의 김주원(현빈)은 길라임(하지원)을 만나자 마자 사랑에 빠진다. 물론 그게 사랑이라는 걸 인정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건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 광속의 속도로, 시청자들 또한 에 빠져들었다. 20부작 드라마에서 1부 40분이 지나갈 때쯤 이미 주원은 라임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애절하게 슬픈 발라드까지 흘렀다. 이런 스피드로 나머지 19부작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려가 자주 현실이 되기도 했고 최종회의 성긴 밀도가 아쉬움으로 남지만, 결과적으로 작가의 모험은 성공으로 끝났다. 은 드라마의 전반부인 4부까지, 캐릭터의 매력과 약점을 튼튼하게 자리잡고, 이야기의 개연성 사이로 촘촘한 은유와 복선의 씨뿌리기를 마쳤다. 이후로는 단단한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화음만으로도 이야기는 저절로 흘러갔다.
뻔함과 신선함 사이의 절묘한 균형
의 설정이 사실상 낡고 익숙한 틀을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선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캐릭터와 배우들의 호연, 그리고 능숙하게 변주되거나 전복되던 전형성 때문이었다. 생생한 캐릭터의 힘은 주요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조연들에게도 두드러졌다. 박상무(이병주)나 문분홍(박준금)-문연홍(김지숙)자매, 김비서(김성오) 같은 배역들은 대기업이 배경으로 나오는 드라마에서 뻔하게 소비될 수 있는 역할이지만, 에서는 그런 뻔함을 정면에서 비꼬거나 한 발자국 먼저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영리하게 우회해나갔다. 한류스타 오스카(윤상현)마저 종종 아줌마의 영혼이 빙의된 듯 천연덕스러웠다. 기억상실 코드 역시 뻔하게 이용되지만, 전반부 뿌려놓은 캐릭터의 깨알 같은 씨앗을 가볍게 쓸어담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전복의 클라이맥스는 길라임이 ‘아드님, 저 주십시오’를 외치는 장면이 아닐까? 부자 남자의 엄마가 내미는 돈봉투 혹은 물컵과 독설을 속수무책으로 눈물로 받아내는 가난한 여주인공들의 비련을 뛰어넘어서, ‘당신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선언하는 그 장면이야 말로, 통쾌한 전복이었다. 기적을 기다리고,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사실상 은 명백한 계급 판타지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안 가진 게 없는 주원과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라임의 결합은 실현이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주원이었고, 그가 제시한 해법이 였다. SBS 에서 계급간 이동이 불가능하다며 강인욱(소지섭)이 이수정(하지원)에게 빌려준 책이 무려 그람시(Gramsci)의 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수정은 여러 번 를 읽어내려 애쓰지만 ‘헤게모니’라는 말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그 책은 해독 불가의 영역에 있었다. 그러나 의 해석은 어렵지 않다. 심지어 각색도 쉽다. 따지고 보면 논란이 많았던 영혼 바꾸기 설정도 를 현실로 불러내기 위한 세팅이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한 남자의 사랑이 마침내 불러온, ‘사랑의 기적’은 나 의 엔딩과도 비견된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오직 유일한 힘, 종종 지구와 인류를 구하던 사랑의 힘은 마침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목숨을 던지게 만들고, 식물 인간을 번쩍 일어나게 만든다.
은 그래서 그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달콤하게 코팅된 당의정 같은 드라마였다. 역설적으로 의 계급간 사랑은 남녀의 영혼이 바뀌는 ‘기적’ 정도는 일어나줘야 실현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잔인한 현실 인식에서 달콤한 사랑의 동화가 펼쳐진 셈이다. 거의 모든 시청자들이 염원하던 대로, 동화의 마무리는 예뻤다. 어리둥절할 만큼 과도하게 예뻤다. 결말의 아쉬움이 오래도록 회자될 수도 있겠지만, 꼭 계급간의 사랑만이 아니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일이, 어느 정도까지는 운명 혹은 기적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은 꽤 보편적인 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사랑했던 의 주요한 장면들은, 주원이 라임을 향해 끝없이 쏟아내던 구애의 말들, 초조한 표정들이 살아있던, 애닯고도 절실했던 마음의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적이 닿아있던 곳은, ‘신비 가든’의 꽃술이 아니라, 바로 그런 작은 순간들이었다. 확실하다.
글 조지영
‘비밀의 정원’은 결국 사랑에 대한 은유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찾아오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감정이지만, 그것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우주의 비밀 못지않게 불가해한 신비와 아이러니의 대상. 은 그것을 “의학으로도 밝히지 못한 영역”인 ‘기적’ 혹은 ‘마법’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애초에 김은숙 작가의 로맨스 장르에 대한 자기반영적 변주로 보였던 이 드라마는 사실 이 장르의 가장 근본적이고 고전적인 질문을 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자 그 답을 탐색하는 여정과도 같은 드라마다.영혼 체인지, ‘완전한 하나’에 대한 판타지
그래서 이 드라마는 수많은 의문문으로 채워져 있다. 주원(현빈)과 라임(하지원)의 만남부터가 “오스카 알아?”라는 물음과 오해에서 시작되며, 그 이후의 전개는 한마디로 ‘나는 대체 왜 당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동어반복적 질문의 연속이다. 가령 자신도 모르게 라임에게 끌리게 된 주원은 묻고 또 묻는다. 오스카(윤상현)에게 “학력도 별로고 어휘선택도 거칠고 가끔 폭력도 쓰고 그런 여자랑 사귀어봤냐”고 묻고, 지현(유서진)에게 “상사병은 증상이 어떤” 거냐 물어본다. 심지어는 라임에게조차 “나 같은 사람이 댁 같은 여자 좋아하는 거 봤어? 현실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며 따지다가 스스로 “나는 지금 딱 미친 놈”이라 결론 내린다.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아무것도 아닌 저 여자와 있는 모든 순간이 동화가 되는 걸까” 자문하기도 한다. 주원을 비롯한 의 인물들에게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난해한 미스터리 그 자체이며, 사랑하는 이의 “진심”은 지금 이 순간 가장 해독하고 싶은 비밀이다. 그래서 주원은 꽃점에 의지해서라도 라임이 과연 연락을 해 올 것인지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하고, 라임은 주원과 같은 책을 읽어서라도 그의 마음을 엿보려 한다.
에서 주원과 라임의 영혼이 뒤바뀌는 설정은 그렇게 서로의 진심에 도달하고 싶어 하는 모든 연인들의 판타지에 대한 즉물적 표현과도 같다. 그것은 “내가 봤던 걸 그쪽도 봤으면 좋겠어. 내가 서있던 창가에 네가 서있고 내가 누웠던 침대에 네가 눕고 내가 보던 책들을 네가” 보기를 바라고, 결과적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다. 꼭 거울을 보듯 상대방에게서 나와 똑같은 모습을 발견하는 상상. 극중 주원과 라임이 서로의 분신처럼 발을 맞춰 걷고 액션 연습을 하며, 마침내 마지막 회에서 한 몸으로 겹쳐진 채 산책을 하는 모습은 그러한 판타지를 그대로 시각화한다. 주제곡인 ‘그 여자’가 ‘그 남자’로 짝을 맞추고, ‘한 남자’가 ‘한 여자’로 영혼의 한 쌍을 형성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처럼 이 영혼 체인지를 통해 보여주는 궁극의 판타지는 모든 경계와 장벽을 초월한, 양성구유의 완전체였던 사랑의 원형적 신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기억 상실 모티브,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판타지
‘기적’이자 ‘마법’인 사랑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모티브는 기억 상실이다. 영혼 체인지가 불완전한 존재들이 온전해지는 판타지였다면, 기억 상실 모티브는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판타지다. 영화 이 그러했듯이 기억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사랑은 로맨스물의 근본적 판타지 중 하나다. 은 기억 퇴행 뒤에도 주원이 라임에게 이끌리는 모습을 통해 또 한 번 사랑의 운명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특히 영혼 체인지의 마지막을 연인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꾸는 지순한 순정으로 그렸던 것처럼 기억 상실 모티브에도 운명적 무게를 더하며 사랑의 절대성을 강화한다. 13년 전 사고에서 주원을 구해준 이는 라임부친이었고, 그 봉인된 기억 속에서 라임과의 운명적 첫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은 바로 라임에 대한 기억 상실이었다.
그리하여 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엔딩신으로 선택한 의 마지막 회는 이 모든 “마법의 시작이자 끝”인 순간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한 해피엔딩의 ‘기적’ 안에 위치시킨다. 결국 장르의 관습을 뒤틀어 계급에 대한 현실인식이나 남녀의 진정한 성장을 그리려던 의도 대신 이 장르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판타지로 돌아온 것이다. 의 진정한 목표는 스스로 ‘신데렐라’나 ‘인어공주’처럼 사랑의 한 원형에 대한 동화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글 김선영
글. 김선영(TV평론가)
글. 조지영(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