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픽션이다. 빙상비무(氷上飛舞)라는 가상의 빙상 종목과 그 가상의 종목에서 신이라 불리던 가상의 인물인 ‘그녀’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다. 만약 이 픽션 안에서 현실의 인물들, 혹은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우연일 뿐이다.



그건, 꿈이었을까. 그녀는 아직도 방금 전 자신이 눈으로 보았던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안도 미키마우스. 일본계 미국인이자 세계적인 빙상비무(氷上飛舞) 스타인 그녀는 어쩐 일인지 빙판(氷板)에 주저앉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어의 뜻 그대로 그렇게 물 흐르는 듯한 수파일얼(水派一蘖, 물의 흐름을 타는 한 갈래 새싹처럼 한 발을 들고 빙상 위를 달리는 기술. 혹은 스파이럴)은 처음이었다. 아니,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처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세계 최고의 자리를 꿈꾸던 그녀의 의욕은 그대로 꺾이고 말았다. 아직도 환청처럼 ‘딩디리딩딩 딩딩딩’ 거리는 음악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사진 자료 보시죠.” 한국빙상연맹(韓國氷上聯盟)의 이승량 과장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여기 얼음 위에 새겨진 유연한 선의 흐름을 보십시오. 이것은 안도 선수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즉, 그녀가 넋을 잃은 모습으로 발견되기 전 다른 인물이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게 누구라는 건가?” 연맹의 상위 간부 한 명이 물었다. 이승량 과장은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이렇게 얼음 위에 유려한 자국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빙상여제(氷上女帝), 빙상여왕(氷上女王), 혹은 팬들을 존중하는 성품 때문에 시애읍후(施愛揖候, 베풀고 사랑하고 절하고 받듦, 혹은 시에프)의 여왕이라고도 합니다만,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내는 건 역시 신(神)이란 표현입니다.” 잠시 사무국은 술렁였다. “자네 말은 그녀가 돌아왔다는 뜻인가? 근거가 확실한 건가?” “안도 선수는 병원으로 옮겨지기 전 계속 해서 ‘딩디리딩딩 딩딩딩’이라는 선율을 흥얼거렸습니다.” “그건?” “네, 맞습니다. ‘그녀’가 즐겨 쓰던 음악, 귀에 착착 붙는다 하여 ‘접착소녀(接着小女)’라 불리는 그 선율입니다. 전무님, 이번 사건 조사를 위해 출장을 허락해주십시오.”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뿌리치고 아사다 마오쩌뚱은 안도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곧장 찾아갔다. 일본계 중국인 빙상비무(氷上飛舞) 스타인 그녀에게 같은 일본계인 안도는 적수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런 안도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그녀는 1개월 앞으로 다가온 국제 대회 연습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달려왔다. “안도, 괜찮아?” 누워있던 안도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나, 아무래도 이번 대회는 포기할까봐. ‘그녀’가, ‘그녀’가 돌아왔어.”



이승량 과장은 안도가 발견됐던 연습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딱히 무엇을 찾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번 사건이 ‘그녀’와 연관됐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꿈같은 시절이었다. 빙상비무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그런 천재가 나왔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깰 수 없는 세계 기록을 세운 다음 날, ‘그녀’는 갑자기 사라졌다. 당연히 별의별 억측이 떠돌았다. 기록을 세우고서 흘린 뜨거운 락후배루(落吼培淚, 쏟아지는 눈물, 혹은 라끄베르)가 사실은 슬픔 때문에 흘린 투래주루(鬪來朱淚, 다툼 때문에 흘리는 붉은 눈물, 혹은 뚜레주르)라는 설도 있었고, 투립악슬(投立樂膝, 무릎의 힘으로 음악에 맞춰 몸을 날리는 기술, 혹은 트리플 악셀)을 익히기 위해 은둔했다는 설도 있었다. 심지어는 날개 달린 나익희(羅翼羲, 날개가 달려 날숨처럼 가벼운 신발, 혹은 나이키)를 신고 하늘로 승천(昇天)한 걸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우리에겐 과분한 존재였다. 그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허전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 그의 눈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조애니 로켓트는 이름 그대로 엄청난 추진력의 수파일얼(水派一蘖)을 시도했지만 ‘그녀’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비애을만(飛埃乙彎, 몸을 활처럼 굽혀 만드는 날아오르는 모습, 혹은 비엘만) 자세로 회전을 시도하며 분위기 반전을 노렸지만 역시나 ‘그녀’의 빠르고도 흔들림 없는 회전에는 미치지 못했다. 모든 종류의 도약(跳躍) 기술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때마다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여주며 로켓트의 기를 꺾었다. 오기가 나다 못해 살짝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그토록 오랜 시간 자취를 감추더니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왜 이런 좌절감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히 깨달은 건, ‘그녀’ 없이 열린 대회에서 우승하는 건 결코 세계 최고를 뜻하는 게 아니란 것이었다.


“이것 보십시오.” 이승량 과장은 화려하게 장식된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 홀(笏, 제왕이 권위의 상징으로 들고 다니는 지팡이)의 일종이었다. 국제빙상경기연맹(國際氷上競技聯盟) 회장의 눈썹은 놀라움과 함께 꿈틀거렸다. “‘그녀’가 세계 기록을 세우고서 연맹으로부터 수여받은 애니익홀(愛尼益笏, 사랑을 더한 홀, 혹은 애니콜)입니다. 이것이 안도 선수의 연습장에서 발견됐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사라졌던 ‘그녀’가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모든 빙상 종목을 통틀어 최고의 선수였던 ‘그녀’를 국제연맹 차원에서 찾아야합니다.” 회장의 눈썹은 더욱 찌푸려졌다. “그건…” 갑자기 회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가 들어왔다. “회장님! 조애니 로켓트 양이 이번 세계 대회 불참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아사다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라이벌인 로켓트의 대회 불참 소식은 놀라웠지만 아주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곧 ‘그녀’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한 때는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산다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사라진 뒤에는 오히려 더 큰 공허함에 시달려야했다. 어디선가 낯익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딩디리딩딩 딩딩딩 딩디리딩딩 딩딩딩’



이승량 과장은 자기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그녀’를 빙상에서 쫓아낸 것이 국제연맹이란 말입니까? 그것도 우리나라의 단거리 계주에 불이익을 주는 편파 판정을 미끼로요?” “자네, ‘그녀’가 왜 신이라 불렸는지 아나? 세상에는 개념과 실제가 있지. 원이란 개념은 있지만 세상에 완벽한 실제의 원은 없네. 빙상비무(氷上飛舞)의 기술도 마찬가지야. 완벽한 개념은 있지만 완벽한 실제는 없지. 그런데 ‘그녀’는 그걸 해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녀’는 말 그대로 신이네. 자네 말대로 최고의 스타일지 몰라도 ‘그녀’가 계속 남아있는다면 그 외의 다른 스타들은 절망하고 말았을 걸세. 하지만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어. 실력으로서는 신의 경지일지 모르지만 결국 ‘그녀’ 역시 자신의 승부욕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싶은 꿈 많은 소녀였다는 걸. 지금 그 오판(誤判)의 죗값을 받는 것 같군.”



투립악슬(投立樂膝)이었다.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술이지만 아사다는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가 그 기술을 쓰는 것이 놀랍진 않았다. 아마 지금이라면 스스로 세웠던 세계 기록을 한 번 더 경신(更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놀랍지 않았다. 어찌 됐든 자신의 옆에서 벅찬 표정으로 얼음 위를 질주하는 ‘그녀’는 신이니까. 그 예쁜 눈매 끝에 촉촉한 무언가가 맺혀있는 것 같았지만 아마 착각일 것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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