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동 감독은 담백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큰 고민 없이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고 드라마 감독이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다른 쪽에 한눈 판 적도 없고 그냥 취업 시즌에 시험 공부해서 MBC 들어와서 신입사원 연수 끝난 뒤 드라마 국을 1지망으로 쓴 건데, 그러니까 정말 하고 싶어 못 견뎠던 건 아니지만 안 하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니라는 거지.” 입사 시험 최종 면접 때의 기억은 “나한테 아무 질문도 안 했다는 것”이라는 회상까지 그의 이야기는 지나치다시피 기름을 빼서 조금 퍽퍽하기조차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황병기 교수의 ‘미궁’을 배경음악으로 대사 없는 뮤직 드라마를 만드는 등 독립 영화 작업에 2년가량 열심히 매달리기도 했던 이재동 감독은 95년 MBC에 입사한 뒤 , , 등 굵직굵직한 히트작의 조연출을 두루 거쳤다. “수습 시절 MBC 파업이 있어서 시간외 수당도 못 받으며 매일 밤새고, 일복은 있는 편이었어요.” 2003년 그가 고은님 작가와 함께 만든 ‘꽃’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었던 신성우, 신인 김보경 캐스팅과 열악한 제작 여건으로 힘겨운 작업이었지만 시청률 20%를 넘기며 단막극의 자존심을 세웠다. “사실 드라마를 보는 시선이나 내가 하고 싶은 드라마에 대한 생각들은 다 입사 이후에 생긴 거예요. 드라마를 인식하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그러다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큰 그림을 보고 일관된 기준을 세워서 만들 수 있게 된 건 때부터인 것 같아요.”

현대극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주에서 대부분의 촬영이 이루어졌던 은 평범한 소재의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공간적 정서를 살린 연출과 섬세한 이야기로 사랑받았다. 2주에 한 번, 나흘씩 전주에 내려가 ‘무식하게’ 두 편을 촬영했던 그는 이후 에서도 배경 ‘푸른도’로 인천 앞바다부터 거제도 앞바다까지 수십 군데 섬을 돌아본 뒤 왕복 열 시간이 걸리는 전라남도 증도를 선택했다. “이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 그림에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해안가 마을을 섬인 척 찍어내는 트릭을 쓸 수도 있지만 섬이 갖는 정서, 심리적인 거리감을 위해서는 물리적인 거리가 필요했거든요.”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에 비해 이재동 감독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서가 열기보다는 온기에 가까운 것은 그가 좋아하고 만들고 싶어하는 드라마가 “가짜가 아닌 것. 편하게, 즐겁게 보고서도 여운이 남는 작품”이라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MBC ‘사과 하나 별 둘’
1993년. 극본 김운경, 연출 정운현
“입사 전 방송된 작품이라 드라마로 완성된 건 못 보고 대본으로만 읽어 봤는데 지금까지 본 대본 가운데 최고라고 생각해요. 눈 덮인 강원도 산골짜기에 소도둑을 잡으러 간 형사와 도둑의 동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후배들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할 정도로 좋은 대본이에요. 언젠가 이 부활한다면 정식으로 리메이크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을 정도로 끌리는데, 막상 그 순간이 오면 ‘괜히 좋은 작품 버려 놓는 거 아닌가?’ 하는 망설임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꼭 도전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에요.”
MBC
1996년. 극본 노희경, 연출 박종
“입사 후 사무실에 쌓여 있는 대본을 이것저것 읽어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던 작품이에요. 그리고 어느 날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방송되는 걸 지나가다 언뜻 보고 ‘에이, 어차피 내용 다 아는 건데’ 라고 넘기려 했지만 보고 있으니까 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노희경 작가가 글을 정말 잘 쓰는 분이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는 아무런 트릭도 테크닉도 들어가 있지 않잖아요. 연출했던 박종 선배 역시 트릭을 안 부리는 스타일이셨는데도 당시 굉장히 반응이 좋았고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나요. 슬프지만 보기에 불편하지 않다는 게 이 작품의 장점인 것 같고 저 역시 불편하거나 어려운 드라마는 만들고 싶지 않아요.”

日 (すいか) NTV
2003년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장하고 설정을 만들어내는 게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요즘에는 ‘굳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거슬릴 때가 있어요. 그런 드라마에 대한 욕심이나 애착은 없지만 그래야 시청률이 나오나 싶어 고민이 되기도 하는데 을 보고 조금 나아졌어요. 한 하숙집에 모여 사는 여자들과 이웃 사람들의 여름나기에 대한 이야기인데, 별다른 내용이 아닌데도 혼자 헤드폰 끼고 웃다가 불쌍하게 여겼다가 하면서 끝까지 봤어요. 그리고, 외국에서도 저런 걸 만들고 있는 거 보면 나도 크게 고민할 것 없이 하던 대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서울이 아닌 지방 도시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 의료사고로 에이즈에 감염된 여덟 살 소녀와 미혼모 엄마가 주인공이었던 , 다문화 가정 출신의 ‘코시안’ 청소년을 등장시켰던 에 이어 이재동 감독이 만들고자 했던 작품은 강풀의 만화를 바탕으로 한 노인들의 로맨스 였다. 캐스팅까지 마친 후 원작 판권을 가진 제작사의 제작비 부족 때문에 방영이 무산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번쯤 해야 되니까, 웃으면서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했던 그는 여전히 아쉽다.

점점 ‘주류’가 아닌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 같다는 말에 “굳이 그러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되짚어보면 그렇게 흘러가요. 하지만 그것도 그냥 보통 이야기일 수 있어요. 다 사람들 이야기니까” 라며 역시 기름기 쏙 뺀 대답을 내놓는 그의 기준은 고집만큼이나 뚜렷하다. “대상을 따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재벌 2세가 그냥 ‘재벌 2세’로만 나오고 ‘사람’이 아닌 건 싫어해요. 아무리 픽션이라도 드라마 안에 하나의 세상이 있는데 거기서만큼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 이어 요즘 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이재동 감독이 하루 빨리 현장으로 돌아올 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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