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작가주의라는 용어를 한국 드라마에서도 쓸 수 있다면 김형식 감독은 그와 가장 먼 가치관을 가진 타입일 것이다. 그가 연출했던 SBS (이하 )와 을 묶는 공통점은 메디컬 드라마라는 장르적 울타리뿐이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환자에 대한 애정만은 넘치는 흉부외과 전공의 1년차의 성장 스토리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벌어지는 두 형제의 블록버스터급 대결 사이의 거리는 2년이라는 방영시기의 차이만큼이나 멀다. 그것은 “내 작품에서 김형식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예술가적 자의식의 무게를 내려놓은 연출가가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리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작품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무책임함과는 거리가 멀다. “스태프를 촬영 장소로 이동시켜주는 버스 운전사도 드라마 제작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드라마는 감독, 작가, 배우, 스태프를 비롯한 수많은 주체가 모여 만든 협업물이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창조자로서의 예술적 발현이 아니라 주어진 조합 안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노력과 치열함이다. 암기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좋은 편이라 비교적 편하게 입시의 통과의례를 넘기고 특별한 목표 없이 대학생활을 하던 그가 “그 땐 정말 열심히 했다고 자신”하는 조연출 시절에 익힌 덕목이다. 입사 2년차 때 조연출을 맡게 되자 오종록 감독은 처음부터 명토 박았다. “널 보듬어 주진 않겠다. 대신 네 110%를 끌어내겠다.” 그 기간 동안 김형식 감독은 오종록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스타일리시한 화면이 촬영장에서의 순발력과 기교가 아닌, 촬영 직전까지 작가와 스태프와 배우를 닦달하고 집요하게 준비하는 과정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로 2007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신인연출상을 받았던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린아라기보다는 치열한 수업을 거치며 장인을 꿈꾸는 도제에 가깝다.

때문에 연출가로서의 그의 꿈은 김형식만의 어떤 세계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연출한 어떤 작품이 10여년 후에도 시청자들에게 좋은 드라마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지금 다시 꺼내 봐도 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다음 작품들처럼.
MBC
1995년 극본 황선영, 연출 황인뢰
“그저 드라마나 영화를 재밌게 보는 것에만 익숙했던 제가 드라마 감독이란 직업을 꿈꾸는 계기가 된 작품이에요. 많은 분들이 황인뢰 감독님의 작품에서 세련된 영상미를 이야기하지만 그것보다도 김희애, 김혜수, 김창완, 김승우 같은 배우들이 4회씩 주인공을 맡으며 총 16부작의 옴니버스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새로웠어요. 사실 오래된 작품이라 내용의 디테일이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주인공이었던 사람이 후경으로 물러나고 후경에 있던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구성 안에서 연애담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게 인상 깊었어요.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이런 방식의 작품을 하면 어떨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해내는 게 황인뢰 감독님이라고 생각해요.”
MBC
1994년 극본 최완규, 연출 최윤석, 이주환
“를 준비하면서 , , 같은 미드와 함께 젊었을 때 본 을 다시 봤어요. 지금 보면 메디컬이라는 장르로서의 측면은 나 , 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죠. 하지만 캐릭터에 있어서만큼은 지금 봐도 결코 어색하지 않아요. 그 이후 등장한 전문직 드라마 캐릭터의 전형이 이미 다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 가슴 따뜻하고 그래서 인간적 약점이 느껴지는 도훈(이재룡)과 냉철하고 능력이 탁월한 현일(전광렬)의 라이벌 구도도 그렇지만 독사 같은 선배 재훈(오욱철)을 비롯한 여러 조연 캐릭터들이 살아 있잖아요. 그래서 최완규 작가에게 정말 어떻게 썼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그때는 아까 말한 미드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잖아요.”

日 (氷の世界)
1999년 후지TV
“에서 초인(소지섭)이 기억상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을 준비할 때 선배 중 한 명이 프롤로그를 참고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물에 빠진 주인공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이었는데 그것만 보려다가 드라마가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어요. 한 여선생의 사고사를 조사하던 보험조사원이 그녀의 학교 동료이자 과거의 연인들을 괴사로 잃은 여주인공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멜로죠. 무언가 수상쩍은 여자를 조사하던 남자가 그녀 안의 상처를 발견하고 보듬어주면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그 심리적 묘사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잘 표현됐어요. 솔직히 말해 결말은 너무 반전을 노린 탓에 좀 맥 빠지는 면이 있지만 전체적인 만듦새는 탁월한 작품이에요. 앞으로 이런 미스터리 멜로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발전보다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를 아직 신인이라고 생각하는 김형식 감독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작품을 찍는 게 편해지는 관성의 순간이다. 이정선 작가와의 협업이 “앞으로 그런 행복한 작업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2, 3년 안에는 같이 작업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래서다. 그런 그가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일상 속에서 꿈을 찾는 아줌마 밴드에 대한 이야기다. 역시나 쉽게 묶이지 않는 필모그래피다. “아직은 발전보다는 변화를 통해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해요.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 발전하길 바라는 거죠.” 다시 말하지만 그는 끊임없는 변화로 스스로를 단련하는 도제 타입의 연출가다. 하지만 천재의 대명사인 다빈치도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마에스트로와 천재는 결국 그 작은 발전이 거듭하며 닿게 되는 목적지의 두 얼굴일 뿐이다. 그는 그 길의 초입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느리지만, 여전히 꾸준하게.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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